한국의 민화 - 효제문자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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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민화의 정의

Ⅲ. 조선후기 민화의 발생배경과 성격
1. 발생배경
2. 성격

Ⅳ. 효제문자도의 의미와 쓰임새

Ⅴ. 문자도의 표현내용

Ⅵ. 맺음말

본문내용

.
그 밖에 단조롭게 그린 산과 구름, 집, 역시 도원을 상징하는 복숭아꽃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각각의 사물들이 따로따로 분리된 채,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다양한 담채를 사용하여 화려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그러나 묘사 실력은 앞의 판화와 비교할 때 많이 쇠퇴한 느낌을 받으며 공간 운용도 일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염’자에는 요 임금때 속세를 떠나 산속에 은거한 고사(高士)와 허유(許由)의 모습을 담기도 하였다. 또 수천 리를 날다가 배가 고파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는 봉황이 등장하는 것이 통례이다. 봉황 대신에 게가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군자로서 염을 실천하는 것은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아는 것이 중요하여 뒷걸음질치는 모습으로 게와 가재 등이 표현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염자의 맨 꼭대기에 커다란 봉황이 그려져 있다. 화면 윗쪽에 세로로 두글자씩‘鳳飛千刃飢不啄粟’(봉비천인기불탁속: 봉황은 수천리를 날다가 배가 고파도 조는 먹지 않는다.)이라고 써놓았다.
봉황은 암컷인 봉과 수컷인 황을 함께 이르는 말로 성인이 세상에 나올때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새이다. 이 새의 머리는 뱀, 턱은 제비, 등은 거북, 꼬리는 물고기 모양이며, 깃에는 오색의 무늬가 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봉황은 살아있는 벌레는 먹지 않고, 살아있는 풀은 뜯지 않으며, 모여 살지 않고 어지럽게 날지 않는다. 그물에 잡힐 것을 걱정하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조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봉황의 성품이 청렴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염자 그림에 등장하게 되었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행서로 씌여진 염(廉)자의 자획 사이에는 벼랑위에 세워져 있는 조그만 누각과 푸른 대나무 잎이 살짝 고개를 내민 모습이 봉황과 대조적으로 귀엽다. 글자에 비해 봉황의 모습이 다소 크게 그려졌고 왼발을 들고 오른발로 지탱하는 모습에서 廉자가 봉황을 오른발을 받쳐주는 지표면이 된 듯 하다.
번지기를 이용하여 둥그스름하고 큼직하게 염(廉)자를 쓰고, 그 위에 활짝 핀 꽃 한송이를 장식하여 북한처녀의 머리모양을 연상케한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허전했는지 글자 맨 아래에 달나라가 아닌 굴속에서 떡방아를 찧고 있는 듯한 두마리의 토끼를 그려 넣었다. 꽃은 청순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순전히 장식적 목적을 위해 그려진 것이다.
떡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는 달을 상징한다. 도교에서는 달에 있는 이 토끼를 옥토끼라 부르는데, 신선이 만드는 선단에 필요한 신약을 빻고 있다고 한다. 토끼는 가끔 불화나 사찰 법당 문에도 장식되곤 한다. 이것은 부처를 대신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공덕으로 훗날 달에 태어났다는 불교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부드럽게 흐르는 번지기의 효과가 독특하며 글자와 그림의 비례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복잡한 상징물들은 사라져 버렸지만 단순하면서도 맑은 이미지 자체로 청렴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치’자에는 백이, 숙제의 고사를 담았다. 백이, 숙제는 은(殷)의 제후 고죽군의 큰 아들과 셋째아들이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둘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양산에 들어갔는데 주(周) 무왕(武王)의 통치가 옳지 않다고 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고 그곳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죽었다는 일화이다. 이에 따라 백이, 숙제의 천추청절 수양매월(千秋淸節 首陽梅月)을 형상화한 매화와 월상도가 표현된다. 그리고 두 사람을 기리는 제각이나 위패가 그려지며 거기에 ‘백세(百世)토록 청풍(淸風)을 드날리는 백이와 숙제의 비(碑)’라는 뜻으로 “백세청풍이제지비(百世淸風夷齊之碑)”라는 명문을 써 넣기도 하였다.
해서체로 부끄러울 치(恥)자를 쓰고 그 안에 이와 관련된 고사를 그려 넣었다. 치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스스로 알고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백이와 숙제의 고사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화면 오른편에 '夷齊陽山嚴陵瀨(이제양산엄릉뢰)'라고 씌여 있다.
글자의 좌변에는 잉어를 낚고 있는 태공망(太公望)이 그려져 있고, 우변에는 아주 작게 축소된 수양산의 정경과 고사리를 손에 쥐고 있는 백이의 모습이 표현되었다. 태공망은 그 당시 주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백이와 숙제가 의로운 사람들임을 알고 이들을 구해주었던 인물이다.
백이와 숙제가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치(恥)의 의미를 좀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저 서산(西山)에 올라가 / 고사리를 캐네 / 무왕은 포악한 방법으로 주왕의 포악함에 대신하였건만 / 슬프다, 그 잘못을 알지 못하네 / 신농(神農) 우순(虞舜) 하우(夏禹)의 도(道)가 홀연히 사라졌으니 / 내 어디로 가서 몸을 의지할 것인가 / 아, 이대로 죽을 수 밖에 없구나”
Ⅵ. 맺음말
18-19세기 조선후기의 효제문자도는 상류층의 정형을 무시하고 그 형식을 차용하여 민중 계층의 기호와 미적 정서에 맞는 독창성 넘치는 형식미를 보여준다. 때로는 치졸하고 왜곡되어 어색하기도 하지만 제멋대로까지 해석하게 되는 나름의 매력은 바로 민중의 솔직한 삶의 정서와 자유 분방한 아름다움에 있다. 그 표현에는 당대 봉건 사회를 근대 사회로 변혁하려 했던 민중들의 대응 문화적 해방의 힘과 시대적 역동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문자도를 포함하여 조선후기의 민화는 서구 문화에 의해 변질된 현재의 우리 정서를 회복하여 민족, 민중 정서로 되돌리기에 필요한 귀중한 모범이다. 그 독창성은 변혁기인 지금 자주적 문화 예술을 생산하기 위해서도 꼭 공부해야 할 분야로 생각된다. 특히 효제문자도는 문자의 회화화 방식이나 문자와 그에 따른 상징물의 조합, 자획을 꾸며내는 장식 무늬와 색감 등 탁월한 디자인 감각으로 지금도 새롭게 다가온다.
【참고문헌】
중앙일보사, 『韓國의 美 8- 民畵』, 1992
김현, 「朝鮮朝 民話의 表現的 特性과 現代的 고찰」『삼척산업대학교』26, 1993
이태호·유홍준, 『문자도』, 대원사, 1995
임두빈, 『한국의 민화』, 서문당, 1995
채홍기, 「조선후기 민화의 양식 변천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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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9.06
  • 저작시기2007.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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