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상과 김부식의 주장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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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인물소개
① 정지상과 김부식
②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

Ⅱ. 인물들의 주장 요약
① 정지상과 묘청의 주장
② 김부식의 주장

Ⅲ. 묘청의 난과 그 후의 평가
① 묘청과 난에 대한 설명
② 시대 배경
②-1 당시 주변 상황
②-2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
②-3 개경 귀족들의 반발과 서경천도운동의 좌절
③ 경과
③-1 묘청의 봉기
③-2 정부군의 진압
④ 평가
④-1 신채호의 평가
④-2 반론
④-3 묘청에 대한 비판
⑤ 영향

Ⅳ. '묘청의 난'을 중요하게 본 이유

Ⅴ. 김부식을 위한 변명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찬성한 것처럼. 하지만 김부식은 금나라 정벌에 반대하였다. 이는 그가 현실적인 힘의 우위를 인정한 외교정책을 주장한 것이지, 조선 후기 멸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쓰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한족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를 주장하던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정말 요금원청이 다 우리 민족이라면 오히려 묘청이야말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려던 원흉 아닌가?
<삼국사기>의 문제도 그렇다. 흔히 <삼국사기>가 사대주의 사서라고 비판하지만 정말 그런가?
<삼국사기>는 기전체 사서이다. 여기서 김부식은 각 나라 왕들이 기록을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본기'는 황제국의 역사에 쓰는 용어이다.
제후국이라면 '세가'라고 쓴다. 조선이 편찬한 기전체사서 <고려사>에서는 '세가'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김부식은 '본기'라고 썼다. 이는 김부식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의 왕조들과 대등했다고 생각했다는 증거 아닌가?
그래도 <삼국사기>에는 단군이 안 나오니까 사대주의로 보는것이 옳은가? 제목을 잘 봐라. '세 나라의 역사'이다. 당연히 세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이다. 이게 편년체사서라면 몰라도,기전체사서에서 세 나라 역사로 정해놓은 이상 동시대에 존재한 부여와 가야 등의 역사도 다룰 여지가 없는데 그 이전의 고조선이 나올 리가 있는가? <삼국유사>에는 나온다는 주장에 대해서 말하자면 <삼국유사>는 '삼국'이라고는 했지만 일연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록한 이야기들을 주제에 맞게 정리한 것이다. 더구나 <삼국유사>의 '사'는 史가 아니라 事이다. 일연 자신도 이것을 역사책으로 쓴 것은 아니니, <삼국사기>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어 단군신화가 들어간 것이지,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서 기록 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삼국사기>에 단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건 아니다.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 이후 동천왕은 평양성으로 가는데, 이 평양을 <삼국사기>에서는 '선인 왕검의 땅'이라고 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 선인 왕검이 단군이라고 본다.
(참고로 동천왕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만주에 있었다고 본다.
이는 식민사학의 거두라 지탄받는 이병도의 견해이기도 하다. 장수왕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라 본다.)
그래도 신라의 기록이 더 많으니 김부식이 신라를 추켜세워 왜곡한 건가?
물론 열전을 보면 김유신은 그 중 분량이 가장 많긴 하다. 하지만 본기를 비교해 보자.
고구려본기는 10권인데, 신라본기는 12권이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보다 더 오래 존속되었다.
게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문무왕까지의 신라본기를 보면 7권이다.
오히려 같은 시기 동안은 고구려본기의 양이 더 많다. 이래도 신라 때문에 고구려를 깎아내린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중국에 맞선 행위를 질타했다? 여기서 주된 <삼국사기>의 비판대상으로 나오는 건 연개소문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왕을 시해하고 집권하였다. 유학자, 그것도 이자겸의 전횡을 목격한 김부식이라면 당나라에 대항 이전에 결코 좋게 봐 줄 수가 없다. 을지문덕이나 이름을 알길 없는 안시성주에 대해서는 김부식도 극찬하였다.
김부식은 중국 풍습이라고 무조건 치켜세운 것도 아니었다. 신라의 족내혼 관습에 대하여 김부식은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풍습에 손을 들어 주었다. 물론 이는 김부식의 신라 왕족의 후예이고, 고려 왕실도 초기에 족내혼이 성행하였고 인종도 이자겸의 전횡 때문이라고는 하나 이모와 결혼한 바가 있단 점도 감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 외에도 김부식은 우리 고유의 호칭도 그대로 기록하였다. 대표적으로 신라 왕의 초기 칭호인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을 그대로 기록하였는데, 그가 정말 골수 사대주의자라면 이런 호칭도 비루하다는 이유로 다 '왕'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 기록과 우리 기록이 상충하면 우리 기록의 손을 들어주는 등 사대주의자라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물론 <삼국사기>가 완벽한 사서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쓰는 이상 유사 이래 완벽한 사서란 존재하기가 어려우며, 김부식에 대한 비판이 과도한 측면이 크다는 게 사실이다. 김부식이 사대주의적 외교질서를 지킨 건 사실이나, 그건 한족 왕조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가 아니라 금나라의 힘의 우위를 인정하고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비록 고려 내부에서만 사용하던 것이었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월'에서 인종을 '성상(聖上)폐하'라고 부르고 있다는 면에서 대외적으로 금나라에 사대는 하지만, 고려의 자주성까지 모조리 내줄 정도로 골수 사대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사대주의라고 쓰레기 취급받는 <삼국사기>이지만 정작 강단에서는 초기기록은 못 믿는다는 생각이 우세했었다. 풍납토성 발굴 이후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대한 반론이 많이 강해지긴 했지만, 이래저래 <삼국사기>는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넘치던 지난 세월을 김부식이 지켜봤더라면 그 기분은 어땠을까?
Ⅵ. 참고문헌
http://www.dcafe.org/216
http://history21.egloos.com/657153
[동아일보] 2001년 6월 9일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1999년 여호규 외, 푸른역사
[한국사 총론] 2001년 유선호, 형설출판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2003년 서의식 김돈 등, 솔
KBS HD <역사 스페셜> -41편- “김부식은 왜 삼국사기를 썼나?”
*목 차
Ⅰ. 인물소개
① 정지상과 김부식
②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
Ⅱ. 인물들의 주장 요약
① 정지상과 묘청의 주장
② 김부식의 주장
Ⅲ. 묘청의 난과 그 후의 평가
① 묘청과 난에 대한 설명
② 시대 배경
②-1 당시 주변 상황
②-2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
②-3 개경 귀족들의 반발과 서경천도운동의 좌절
③ 경과
③-1 묘청의 봉기
③-2 정부군의 진압
④ 평가
④-1 신채호의 평가
④-2 반론
④-3 묘청에 대한 비판
⑤ 영향
Ⅳ. '묘청의 난'을 중요하게 본 이유
Ⅴ. 김부식을 위한 변명
Ⅵ.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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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0.07
  • 저작시기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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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30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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