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석의 생애와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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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일제 하 백석의 문학 활동
1. 남한이 재조명하는 백석의 시세계
2. 북한이 바라보는 백석의 시세계

Ⅲ. 해방 후 백석의 행보와 문학 활동
1. 우회로써의 번역과 아동문학 창작
2. 새로운 공동체와의 만남과 시적 부활

Ⅳ. 월북 / 재북 작가들의 행보와 시세계
1. 오장환
2. 이용악
3. 임화

Ⅴ. 나오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하고,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주어진 현실을 견디지 못해 쓰고 있던 안경을 깨서 그 파편으로 오른손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임화에 대한 비판은 1953년에서 56년에 이르기까지 김남천, 이태준 등 문학가동맹 문인들에 대한 반종파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계속되었고, 이후 임화의 문학은 북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문학예술사전이나 북한문학사에도 임화의 이름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 탈북 지식인들은 반동작가, 미제 고용간첩으로서의 임화만을 기억하고 있다. 임화의 문학은 사라지고 그는 선전용 구호로만 이름을 남기고 사라져 간 것이다.
Ⅴ. 나오며
백석. 그는 엄밀히 말하면 재북 시인이었지만, 남한에서는 월북 시인으로 규정돼 근 40년동안 잊혀진 문인이었고, 북한에서는 그의 순수서정성과 몰이념적 성향이 문제가 돼 북한 문학사에 이름 한 자 제대로 남기지 못한 무명 시인이 되었다. 유족들은 백석이 남긴 번역 원고와 창작 노트 등을 휴지로 써버려서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조영복,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p.96
물자가 부족한 북한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이유에서뿐 아니라 가장 낮은 단계의 ‘생활’ 차원에서도 존속되기 어려웠던 것일까. 예술이 삶보다 우월하거나 예술을 위해 삶을 희생한다는 예술가적 자존심은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없는 북한 체제에서는 지나친 호사였을 것이다. 결국, 40여 년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백석의 행적은 밝혀졌으나 그의 문학 자서전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그를 비롯한 수많은 월북, 재북 시인들 역시 이념인으로서의 자기 선언과는 관계없이 역사의 격랑에 내맡겨지고 망각의 늪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언어는 체제의 한계나 체제의 억압을 넘어서서 인간 정신의 유곡을 흐른다. 백석의 시를 두고 이효석은 그 속에서 자기의 ‘고향을 찾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김윤식, <한국근대문학사와 월북작가 문제> p.197
그는 우리말이 다양한 이미지의 스펙트럼을 통해 어떻게 맛깔지고 아름다운 울림들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백석 시 속의 표현된 말, 살아 있는 말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고통, 울분과 연민과 사랑을 추억한다. 백석의 시는 얼핏 보면 향토적 정취를 드러내기 위한 토착어의 나열 같으나, 실상은 고도로 세련된 모더니즘의 일종이다. 마치 그것은 가장 모더니스트인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을 쓴 것과 흡사하다. 백석의 시가 오늘날에도 퇴색하지 않은 비밀이 이에 있는 것이다. 시에서의 이러한 방법론의 실험은 백석 이후에 시도된 바 별로 없는 듯하다.
물론 1930년대에 쓰여진 백석의 시와 비교했을 때, 해방 이후 북한 체제 아래에서 쓰여진 그의 시는 변화된 현실 사이만큼이나 변모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농촌 현실 속에서 평범한 농장원으로 살아가면서, 현실 자체보다는 그것에서 미래의 바람직한 모습의 단초를 읽으려고 하였던 그의 노력은 일제하 그의 시세계로부터 이어졌던 것이지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물론 그의 시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직접적인 어휘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였지만, 처음부터 월북이 아니라 재북 시인이었던 백석을 두고 ‘사상적 편향’을 하였다는 둥 ‘사회주의 체제 찬양을 위한 도구로 변질’하였다는 둥의 비판을 가하는 것은 그의 시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1962년 일련의 작가들이 숙청된 이후 백석이 전혀 글을 발표하지 않은 것에는, 지방 농촌의 협동조합에서 자신의 공동체적 유토피아의 전망을 읽어내려고 했던 그의 시도가 국가사회주의의 큰 벽 앞에서 좌절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결코 사상적인 이념을 따라 북한 체제를 찬양하거나 혁명의 당위성을 옹호하기 위해 시를 쓴 것이 아니라, 비록 외적인 정세는 변했지만, 토착 정서의 세련된 정제를 통해 공동체의 유토피아를 찾으려고 하는 그의 본질적인 문학관을 그대로 북한에서의 창작에 도입한 것이다. 즉, 그의 시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 지향했던 세계의 지속 속에서의 변모이지 그것을 벗어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후 그의 시 속에서는 여전히 토착적이고 민속적인 정서가 세련된 언어로 표현되고 있으며, 풍부한 정주 방언과 풍습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오히려 협동 조합원 시기의 시 <동식당> <전별> 등에서는 그 전의 백석의 시에서는 기억의 편린이었던 공동체가 현실의 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세계는 매우 뿌리 깊은 것이며 탄탄한 것이었다고도 유추해볼 수 있다.
1962년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년간 전혀 글을 발표하지 않고 평범한 주민으로서 살다가 간 백석. 그를 비롯한 월북, 재북 작가들의 존재는 역사가 어떻게 인간의 운명을 구속하고 개입하는 것인지를 자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되기에 충분하다. 백석의 유고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이 비극적인 현실이 우리 문학사의 미완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의 대표작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의 마지막 구절인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라는 대목에서 ‘갈매나무’는 그가 북한의 농장원으로 살면서도 버리지 못한 정결한 시인으로서의 존재감, 영원히 그의 내면에 품은 시인으로서의 마지막 꿈이었을지 모른다.
* 참고문헌
정효구,「백석」, 서울, 문학세계사, 1996
박혜숙,「백석 : 우리 문화의 원형탐구와 떠돌이 삶」, 서울,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5
김재용,「백석전집」, 서울, 실천문학사, 1997
조영복,「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서울, 돌베개, 2002
채훈 「월북작가에 대한 재인식 : 한국문학사의 맥잇기」, 서울, 깊은샘, 1995
김윤식,「너 어디 있느냐 : 在北, 越北 解禁詩人 99 作品選集」,서울, 나남, 1988
김종회, 「북한문학의 이해1,2,3」, 서울, 청동거울, 1999
고봉준, <남북한 시문학의 접점과 근대문학 -정지용과 백석을 중심으로>
김윤식, 「북한문학사론」, 서울, 새미, 1996
김윤식, <한국근대문학사와 월북작가 문제>
김학동, 「오장환 평전」, 새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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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1.04
  • 저작시기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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