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정치사상과 화성축조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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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目次

Ⅰ. 序論

Ⅱ. 正祖의 社會統合思想
1) 義理論
2) 名檢論
3) 言論
4) 進退論

Ⅲ. 正祖의 蕩平策
1) 蕩平의 槪念과 蕩平論 擡頭
2) 義理 蕩平論의 展開

Ⅳ. 正祖의 産業振興策
1) 大都會 造成
2) 商工業振興策
3) 農業振興策

Ⅴ. 華城의 建設 背景
1) 思悼世子의 무덤이전
2) 옛 華城의 新都市로의 移動
3) 老後居處로 構想한 正祖의 華城建設

Ⅵ. 華城 建設과 正祖의 王權强化策
1) 正祖의 王權强化를 위한 華城建設
2) 壯勇外營의 設置
3) 華城行次의 意味

Ⅶ. 結論


※ 參考文獻

본문내용

인 자세로 인해 正祖시대의 上言擊錚은 그 양과 질의 측면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우선 양적으로 볼 때에 正祖는 재위 24년간 총 4,427건의 상언격쟁을 접수처리하여 역대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正祖時代의 상언격쟁은 새로운 면모를 보였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위외격쟁의 허용과 백성의 고통에 대한 상언의 허용, 각종 윤음에 언해본을 첨부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우선 正祖는 英祖時代까지상언격쟁이 남발된다는 이유로 금지 되어온 위외격쟁을 허용하였다. 위외격쟁이란 능행처럼 국왕이 교외로 이동할 때 징을 쳐서 억울함을 알리는 행위로서, 군졸이 시위하고 있는 위내에까지 돌입하여 감행하는 위내격쟁과 대조를 이룬다. 正祖는 즉위 직후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위외격쟁을 허용하라는 敎書를 반포하였다. 正祖는 특히 華城行次 등 각종 능행을 통해 백성들의 말을 듣고, 민폐를 적극 해결하려 하였다. 正祖시대는 유난히 국왕의 행차가 잦았는데, 그는 재위 24년간 70여회나 경기도 일원에 산재한 王陵을 찾아 나섰다. 국왕이 민정을 살피고 민의를 알기위해 궁성 밖을 나오기 시작한 것은 英祖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英祖는 시민향민들로부터 의견을 듣기 위해 자주 궁성문이나 도성문에 임했다. 영조가 이처럼 도성 안 또는 도성 문에서 백성들과 만난 데 비해, 正祖는 주로 도성 밖으로 나와서 백성들의 소리를 들었다. 또한 즉위 이후 3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대민 접촉을 시도한 英祖와 달리 正祖는 즉위초반부터 대민 접촉을 積極的으로 시도하였다. 正祖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대민 접촉을 시도한 것은 王世孫으로서 英祖의 국정운영을 보좌하면서 일찍이 그 重要性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王世孫으로서 1765년(英祖41)明陵 拜謁 때 英祖를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관료들의 중간 왜곡 없이 직접 백성들의 말을 들으려 하였다. 이는 임금과 백성 사이에서 국왕의 德義를 歪曲하고 “중간에서 소멸시켜버리는”, “탐오하고 교활한 관리들”을 제거해야만 聖王의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의 정치관에서 비롯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正祖의 華城建設과 陵行에는 복합적인 동기와 다양한 의도가 내재해 있었다. 生父 思悼世子의 名譽回復(1795년 존호로 추승)과 그에 따른 국왕 자신의 정당성 제고, 정적(僻派)의 위협을 통한 국왕지지세력(時派)으로의 전향 유도, 수도권 방위체제의 점검과 군사훈련의 기회 마련, 국왕의 재정적 후원도시로서 신도시 건설, 백성들과의 직접적 소통을 통한 민원 해결과 민심 획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자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성왕의 정치 실현 등이 그것이다. 박현모, 위의 책, (2001) pp.85~92
Ⅶ. 結論
朝鮮時代의 時代思想이 性理學이고 朝鮮後記 社會는 性理學 理念이 國家, 社會에 具體化된 歷史의 장이었다. 이 시대 국민적 화합과 동의는 어떻게 모색되고 가능성을 확보해 갔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朝鮮 後記 社會에서도 그 文華의 꽃이 만개한 진경시대 최고의 통치자의 社會統合思想을 먼저 알아보았다. 正祖는 義理가 변질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었다. 이 時代는 性理學的 名分社會였기 때문에 名分을 確保하는 일이야말로 政治行爲의 기본 축으로 작용했다. 名分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통치행위였다. 힘으로 暴壓하는 국가의 壽命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은 東西古今의 歷史가 증명하고 있다. 朝鮮王朝의 長壽現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義理와 名分이라는 통치 철학의 해명이 필요하고 그것의 社會的 技能이라는 측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義理와 名分이라는 기준이 확고하게 설정된 상황에서 그에 기초한 言論이 제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던 朝鮮王朝의 언론 정책은 언관의 바른 소리가 직무상의 의무 사항이었고 이를 위반했을 때 직무 유기로 비판 받는 등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思悼世子의 죽음이후 갖은 파란을 거쳐 王位에 오른 正祖는 先代로부터의 蕩平政治의 志向을 繼承하면서 일면으로는 그 克復을 시도했다. 正祖는 그 克復策의 하나로 水原에 華城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華城建設은 朝鮮의 국력이 기울여진 국가적 사업이자 卽位 20년을 맞아 正祖 王權의 역량을 과시한 記念碑的 사업이었다. 이와 연계되어 추진된 장용영의 강화 및 수원신도시의 발전을 위한 상업과 농업 진흥책은 正祖대 후반의 社會經濟的 상황을 반영하는 代表的 時策들로서, 正祖 代와 이 시기 朝鮮社會의 歷史的 性格을 이해하는데 關鍵이 되고 있다.
※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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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齋全書』, 권177, 「日得錄」 訓語(南公轍, 壬子錄)
『弘齋全書』, 권177, 「日得錄」 訓語(徐榮轍, 壬子錄)
『弘齋全書』, 권177, 「日得錄」 訓語(李晩秀, 壬子錄)
『弘齋全書』, 政事(李晩秀, 庚戌錄).
『弘齋全書』, 권169, 「日得錄」 訓語(鄭民始,丁巳錄)
『弘齊全書』, 권 175, 203쪽 하단.
『弘齊全書』, 권 177, 251쪽 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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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1.17
  • 저작시기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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