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 사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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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코소보의 역사
2. 창살 없는 감옥, 코소보의 알바니아인
3. 코소보 사태의 전개과정
4. 코소보 사태의 의미와 그 영향

Ⅲ. 결 론

Ⅳ. 참고자료

본문내용

하고 있다. 여전히 코소보를 자신의 종교적 성지이자 중세국가 발원지로 중요시 여기는 세르비아인들 그리고 미국의 전략적 지지를 바탕으로 독립국가 건설, 이후 이웃 알바니아와 함께 대 알바니아주의를 실현하려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간의 긴장과 분쟁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크게 4가지 문제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서구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이 지역의 문제해결이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실제 공습이후에도 이전처럼 이 지역을 둘러싸고 강대국들간의 영향력 다툼이 전개되고 있다. 러시아는 발칸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세르비아를 지지하고 있으며, 중국도 또한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나토의 신전략개념, 즉 기존의 방위개념에서 공격개념으로 전환을 위한 시험무대로서의 코소보의 중요성과 향후 여타 지역에서 다시 등장할지도 모를 소패권주의에 대한 견제 그리고 발칸유럽에서 러시아를 대신해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 영향력 확대를 억제시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코소보의 향후 문제를 둘러싼 이러한 양 세력간의 대결 양상과 그 결과에 따라 코소보의 향후 진로가 결정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주권침해와 세르비아니즘에 대한 피해의식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문제이다. 세르비아인들은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미국의 코소보 공습이 주권을 가진 한 국가에 대한 주권침해 행위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코소보 공습이후 세르비아니즘 확대의 대표 지역이었던 코소보에 대한 피해의식은 세르비아인들에게는 큰 상처를 남겨주었다. 특히 공습 이후 알바니아인들의 세르비아계에 대한 역보복 문제는 세르비아 내에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더욱 자극하였으면, 또한 이러한 결과는 처음 미국과 나토가 공습이유로 내세웠던 소수 민족의 인권문제가 그 형평성을 잃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세 번째는 모순적이지만 상당수의 유럽국가들과 세르비아가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세르비아는 계속해서 알바니아인이 중심이 된 코소보 독립은 곧이어 주변 마케도니아 내 알바니아인과 알바니아 국가의 통합을 불러올 것이고, 이것은 발칸유럽의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라 주장하여 왔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록 나토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나, 문명적으로 반 이슬람적 성향을 띠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은 코소보 독립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네 번째 문제로는 코소보 공습이 유엔을 배제한 미국과 나토의 독자적인 결정이었다는 측면에서 현재도 그러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지만, 향후에도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주체의 혼선이 나타날 거라는 점이다. 즉 보스니아 분쟁 당시 보스니아 정부가 한 국가의 주권 수호 차원에서 스스로 국제 사회의 지원을 요청했던 때와는 달리, 1999년 코소보 전쟁은 유엔과 안보리 등 여러 국제기구들의 반대를 무릅쓴 미국과 나토의 일방적인 공습이었다는 측면에서 국제법상의 문제를 낳았다. 따라서 코소보 공습 이후 확대된 유엔의 위상 추락과 더불어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코소보 내 여러 민족갈등에 대한 처리문제 또한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철민, 「발칸 유럽 사회와 문화」(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4), pp244~247
Ⅲ. 결 론
1991년 이후 발칸 반도를 잿더미로 만든 내전은 이제 멎었다.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명목으로 겨우 목수만 부지한 채 정든 고향을 떠났다. 가족과 생이별한 채, 삶의 뿌리였던 터전을 떠나 유랑의 길로 들어섰다. 경제는 완전히 송두리째 뽑혀 나가 버렸고 황무지에 다시 선 이들은 재기의 의욕마저 상실해 버렸다.
왜 인간은 이토록 처참하게 서로를 죽여야 했을까. 세계의 6대주 가운데 가장 문명 대륙이라고 하는 유럽 대륙의 한 모퉁이에서 가장 비문명적인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역사의 문제였다. 발칸은 늘 강대국의 야욕을 채우는 대상이 되어왔고 강대국은 발칸의 정복자로 행세하며 그곳에 오롯이 몸담고 사는 사람들을 착취했다.
이 같은 피정복민의 역사는 민족주의의 뿌리마저 왜곡시켜 전쟁의 두 번째 이유가 되었다.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광신적으로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의롭지만 다른 민족은 사탄이라는 사고 방식이었다.
발칸이 주는 세 번째 교훈은 진정한 지도자의 부재였다. 발칸 역사상 위대한 사람으로 불리워진 인물의 수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 대 부분은 사랑을 가르치지 않았다. 싸움과 적개심만을 가르쳤다.
유고내전은 발발 초기에 진화될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혹자들은 이 내전이 미국, 소련 간 냉전시대에 발생했다면 2주만에 끝이 났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양대 초강국이 합의만 하면 국제 정치의 갈등은 해결될 수 있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냉전 시대를 맞아 다국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그야말로 유고 내전은 새 질서를 시험해 보는 시금석이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지는 않았다.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가 주는 교훈은 오늘날의 한국에도 해당된다. 반세기 이상 남과 북은 서로를 적대시한 채 미움만 키워 왔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이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한 방안은 결국 평범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 지루한 시간동안 서로를 사랑하고 인내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연습이 전제되지 않는 한 또 다른 발칸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재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김성진, 「발칸 분쟁사」 (서울, 우리문학사, 1997), pp287~290
Ⅳ. 참고자료
김성진, 「발칸 분쟁사」 (서울, 우리문학사, 1997)
김철민, 「발칸 유럽 사회와 문화」(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4)
티리크 알리 외, 「전쟁이 끝난 후」 (서울, 이후, 2000)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서울, 김영사, 1997)
http://www.naver.com
http://kida.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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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1.22
  • 저작시기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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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37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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