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경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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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

◎실학의 개념과 형성배경

◎실학의 발전

2.본론

◎중농주의

◎중상주의

3.결론

◎실학의 의의

본문내용

개한 「의산문답」과 비견되는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은 분량이 「의산문답」의 3분의 1도 안되고, 논의의 진행도 그다지 짜임새 있는 편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당시의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추구하는 사회질서제도 개혁론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임하경륜」의 맺음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옛것을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통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빈말을 하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 쓰임에 맞게 하는 것이 귀한 것이다.……시행한지 오래되어 폐해가 잇따르니, 갈기갈기 찢기고 소략함이 이처럼 심하게 되었다. 오늘의 계책을 세우매, 마땅히 옛 법도를 따라 그것을 거듭 밝혀야 하는가, 마땅히 앞의 법을 바꾸어 경장해야 하는가?
그는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옛 도를 회복시키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법을 경장하는 것 즉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의문의 형식으로 제기하였지만, 그의 생각이 후자에 있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는 경제면에서 토지개혁안을 제기하였다. 그의 개혁론에서 토지개혁안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개의 유학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토지제도의 이상은 정전제에 있었다. 정전제는 토지의 균등한 소유와 생산량의 1/9 납세를 포함하는 이상적인 토지제도이다. 그러나 정전제는 그저 이상일 뿐 그것을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당연히 변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가 제기한 토지개혁안은 아래와 같다.
아홉 도의 토지를 균등하게 분할하여 10분의 1을 취하고 결혼한 남자 이상에게는 각각 2결씩을 받게 한다. 밭두둑의 울타리 밑에 뽕과 삼을 심도록 하는데, 심지 않는 자에게서는 벌로 베를 받는다. 항상, 여자가 3명이면 베 1필, 여자가 5명이면 비단 1필을 받는다.
결국 그의 토지개혁안은 결혼한 남자들에게 2결씩의 토지를 균등 분배하는 일종의 균전제를 골자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 전통적으로 이상적인 세율로 인정되어 온 10분의 1부세 제도를 첨가한 것이다. 이 외에 그는 각 행정 단위마다 징수한 세액의 10분의 1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상급 단위로 바치며, 내수사를 혁파하여 궁방전을 호부에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토지의 겸병을 혁파하고 농민과 국가의 부를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기본적으로 정전론한전론균전론 등 전통적인 토지 개혁론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토지개혁론은 현실 속에서 설득력을 그다지 갖지 못한다. 거기에는 현실 속의 여러 직분계층에 대한 자세한 고려나 제도 실행의 절차와 방법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일체의 직분과 계층의 차이를 무시하고 토지의 완전하고 전격적인 균등분배를 주장했다고 이해하기에는 논의 구조가 너무 단순하고 주장의 강도도 높지 않다. 그러한 이해보다는 토지제도 문제에 대한 그의 태도가 지극히 관념적이며, 그런 만큼 불완전한 논의에 머문 것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4>박지원
박지원(1737~1805)의 호는 연암이다. 그는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청에서 지내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박지원의 개혁론은 이용이 있은 후에 생활을 풍족히 하고 인간의 도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에서 출발한다.「과농초소」,「한민명전의」를 통해 토지소유 상한선을 제시한 한전론을 주장하였고 기술 개발상업작물 재배를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농민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위정자가 농업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농학을 연구하며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보급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토지 소유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 제한하여 점차 빈부의 격차를 감축하려하였고 당시의 민생고의 해결을 위하여 토지겸병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신분제도에 관하여 적서의 차별이 악법임을 지적하였고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외국과의 통상 선진적인 기술의 도입을 주장하였고 존명 사대주의를 배격하여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록 오랑캐의 학문일지라도 선진 과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실학적 태도 때문에 신분질서의 개혁과 실용주의를 주장한 실학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3.결론
◎실학의 의의
중농학파와 중상학파의 둘은 부국강병과 민생의 안정을 추구, 양반 문벌 사회의 모순점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에 공통적인 의의가 가진다. 다만 중농학파는 토지의 분배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지주제를 부정하고 자영농의 육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상공업 발달은 빈부차를 초래하므로 상공업의 발달이나 화폐 경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에 중상학파는 상공의 진흥에 일차적이 관심을 가졌으며, 지주제를 수긍하며 농업의 전문화와 상업화, 기술화를 통해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국가 통제 하에서 상공업의 보호, 육성을 주장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1)실학의 역사적 의의
성리학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서, 우리의 문화가 중국 문화의 일부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으나 실학자들은 우리 문화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회체제의 개혁, 생산력의 증대를 통한 근대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피지배층의 입장을 대변하고 옹호하고자 했다. 성리학이 봉건적 지배층의 지도원리였다면, 실학은 피지지배층의 편에서 제기된 개혁론인 셈이다.
2)실학의 한계성
실학은 대체로 정치적 실권과 거리가 먼 남인, 또는 서인의 서얼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를 지지해 줄 만한 광범한 사회적 토대가 미약하였다. 그리고 실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의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3)실학의 계승
18세기를 전후하여 융성하였던 실학사상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이었다. 중농학파의 사상은 한말의 애국 계몽사상가와 일제시대의 국학자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중상학파의 실학사상은 19세기 후반에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실학의 경제사상

키워드

실학,   중농,   중상
  • 가격1,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7.11.23
  • 저작시기2007.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38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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