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카리스마 정주영 VS 카리스마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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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도 상당했거니와 전문가 못지 않은 식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병철은 평생 세 번이나 홀인원을 한 진기록을 수립했을 정도다. 정주영이 신격호 회장과 눈덮힌 필드에서 빨갛게 칠한 공으로 골프를 즐겼다는 일화는 정주영이 임기응변이 강하고 유머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느끼게 해 준다.
부자가 된 사람 치고 근검절약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병철도 소문과는 달리 아끼는 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점은 잘 믿어지지 않는다. 이병철은 돈을 의미 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지만 그 돈으로 즐길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반면 정주영은 실제로 굉장히 검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무엇을 써도 닳아 없어질 때까지 썼으니 가히 믿어지진 않지만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마음이 생긴다. 두 사람은 패션감각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병철 회장은 살아 생전에 한국의 경제인 중에는 가장 멋쟁이였다 한다. 반면에 정주영 회장은 패션에 무심했다. 그가 유일하게 멋을 내는 것이 있다면 모자였다. 정주영은 옷 잘 입는 경영인이라는 말은 평생 듣지 못했지만 어떤 일류 제품의 의상을 입은 것보다 더 돋보이는 우리 아버지들 같은 경제인이었던 것이다.
이병철은 만년에 손자들을 불러 <논어>를 가르쳤다. 이병철은 기업인 이전에 사람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병철은 손자들과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틈틈이 골프장에도 이따금 나갔지만 작고 직전에는 그렇게 좋아하는 골프도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잔해져 있었다. 자신이 만든 안양골프장을 떠난 20일 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은 일흔여덟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기업인으로서의 50년. 그가 세우거나 인수한 기업들은 제일제당(1953년 설립), 제일모직(1954년), 동방생명(1957년), 삼성전자(1969년), 삼성중공업(1974년), 용인자연농원(1975년), 삼성반도체통신(1980년) 등 37개였다. 20세기를 이끌어온 경영의 달인, 세기의 거인은 세상을 떠났다. 1990년 정주영은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그 후 한·소수교가 이루어지고 국교정상화가 되었다. 정주영은 이 때부터 북방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98년 6월 16일, 정주영은 판문점을 통해 소떼 500마리를 몰고 방북해서 전세계인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의 방북은 꽁꽁 얼어 있던 남북대결을 단숨에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로 바꿔버렸다. 1998년 10월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그 자리에서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정주영은 2000년 6월 북한을 방문한 후 기운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2001년 3월 22일, 정주영은 아산 중앙병원에서 향년 여든여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대그룹의 총수로 83개 기업을 일으켜 각국의 세계적인 대기업과 어깨를 견주어온 세계적인 기업인이었다. 그러나 개인 정주영은 철저하게 보통 사람으로 살아왔다. 한국형 건설의 1세대 선봉에 서서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섰던 거인, 정주영.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경제인, 정주영도 떠날 때는 보통사람이었다. 현대건설(1950년), 현대자동차(1967년), 현대중공업(1973년), 현대미포조선(1975년), 현재전자(1985년) 등 80여 개의 기업군을 일으켰고, 서울올림픽유치 위원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지내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뛰었다. 그는 정말 부지런한 한국인이었다. 성격은 불같아서 자식 8형제 중 맞아보지 않은 아들이 없다고 한다. 백스무 살까지 살면서 서사 간척지에서 일을 하고 싶어했던 정주영 회장은 20세기를 산 위대한 한국인이었다.
정주영, 이병철 두 거인은 격동기의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주역들이다. 그들이 1960년대 이후 도약기의 한국경제를 오늘날 이만한 발판 위에 올려놓는 데 앞장섰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정주영의 도전 정신, 치밀하고 꼼꼼한 이병철의 분석과 판단. 이것은 우리 경제사의 귀중한 자산이다. 이제 두 거인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적인 유산을 좀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 미래를 개척하는 초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병철과 정주영, 정주영과 이병철. 그들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 정주영을 자신을 「나는 아주 부유한 노동자」라고 표현했고 이병철은 자신을 「발전을 추구하는 노력가」라고 표현했다. 타인들의 평가에 있어서 정주영은 「닳지 않는 건전지」, 「로맨틱한 드리머」라는 평가를 받았다면 이병철은 「철저한 상인」이란 평가를 받았다. 두 사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이병철이 상류층 수준이었던 반면 정주영은 서울 중류층 수준이었고 기본성격도 이병철은 차분하고 이지적인 반면 정주영은 저돌적이고 공격적이고 밤을 새워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주요업종에서도 이병철은 질 위주의 경영으로 경박단소하고 정주영은 스케일이 크고 물량도 많고 중후장대했다. 이처럼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세계적 기업인이 되어 성공하기까지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두 사람 모두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정주영이 자주 쓰던 말 "해보기나 했어?"처럼 해보지도 않고, 도전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두 번째는 사람을 끌어 모으고 그 사람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람관리를 탁월하게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 번째는 어떤 불가능한 상황이 닥쳐도 그 안에서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목표를 달성해나갔다는 점이다. 네 번째로, 두 사람은 공사에 실패하거나, 사업에 실패해도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다섯 번째로, 정주영과 이병철은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왔다. 정주영은 건설-조선-자동차-반도체로, 이병철은 제당-모직-가전-반도체 등으로 시대 흐름과 분위기를 읽고 거기에 대처해왔다. 할 수 있다는 신념과 강인한 추진력. 오늘날 정주영과 이병철, 두 기업가의 삶을 우리가 되새겨 배워야 할 점이 바로 그것이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우리는 그들이 굳은 신념으로 항상 힘을 내었던 이 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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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1.25
  • 저작시기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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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38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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