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문화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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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제문화의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섬의 면적 및 특성
170km2 - 주거지, 농경지, 채석장, 종교시설의 흔적 등 15000개 이상의 고고학적 유적 산재 (연대 700-1860년, 1800년대까지 선사시대 계속)
* 태평양지역
폴리네시아(하와이 제도, 뉴질랜드, 이스터 섬을 잇는 삼각형 지역)
엘라네시아(호주 북동쪽으로 연속해 있는 섬들)
마이크로네시아(적도 이북, 경도 180도 서쪽에서 필리핀 동쪽에 걸친 지역)
▷ 섬의 생성 ;
70만년 전 지하 2900미터의 지구 깊숙한 곳에서 상승한 뜨거운 맨틀이 이스터 섬이 생긴 곳에서 분출하여 격렬한 화산 활동을 시작. 여기에 170만년 전 해저 암반의 이동 이후 생겨난 화산활동이 겹쳐 화산이 급속 성장. 마침내 해수면으로 그 얼굴을 드러냄.
섬의 양쪽 끝에 자리한 라노카우와 푸아카티키 산 그리고 섬 중앙의 가장 높은 텔레바카산이 점점 위로 성장하여 삼각형의 섬을 형성. 이것이 바로 이스터 섬의 탄생이다.
▷ 섬의 동, 식물상
약 20만년 전에 화산 활동이 끝남 (용암섬)
식물의 전래 방법은
① 표착
② 새 등의 동물에 의한 종자의 산포
③ 종자나 포자가 바람에 날려 오는 것이다.
이 중 바람에 날려 분초를 확대할 수 있는 식물은 종자가 작은 난이나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식물로 한정. 이전에는 이 곳 고유의 아열대림이 무성. 그것은 화구호 밑바닥에 퇴적한 진흙 속에 분포한 꽃가루를 통해 밝혀짐.
주요수종 : 콩과의 소포라 토맨토사와 근연관계인 토로미로, 저옥의 라시움 샌드윈센스(가지과)나 덩굴섬의 스태파니아(콩과)등 => 이들 종자는 해류로 운반되는 것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이들 나무를 건축재, 선재, 롱고롱고의 판, 창의 손잡이, 모아이를 운반하는 지주로 이용 그 나무껍질은 로프의 재료로서 활용
■ 이스터 섬의 수수께끼, 모아이
▷ 모아이의 규모 : 평균 4미터, 최대 21미터
▷ 모아이란?
거대하고 고도로 양식화된 석상. 세대가 바뀜에 따라 사람들이 신격화하여, 예배를 몰린 폴리네시아 인의 수장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됨. 씨족들의 영토를 감시하고 이스터 섬 사람들의 풍성한 수확과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모아이로 만들어진 수장들의 역할이었다.
▷ 모아이의 제작 - 모아이의 제작은 사회에 널리 침투해 있었다. 작은 석조상은 일반 집에도 있었고, 큰 것은 다양한 크기
-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의 결과 : 1200년경에 시작되어 1500년대말 까지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백년동안 900개나 되는 모아이를 제작. 초기 석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아후를 증축, 개축할 때에 낡은 석재를 부숴 이를 건축재에 섞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이었기 때문. 아후의 개축은 선사시대 이래 계속되어 온 일인데, 이 사업의 수행을 통해 수장이나 신관들이 사람들의 지지 속에 사회에서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유지
▷ 석상의 재료 및 제작 방법
기록으로 남아있는 모아이의 대부분은 라노라라크의 황색 응회암으로 제작 지금도 이곳 채석장에는 350개나 되는 석상이 방치. 석상은 단단한 현무암으로 만든 크고 무거운 석기를 사용하여 응회암으로 제작. 골처럼 사용된 석기의 대부분은 라페루즈 만 부근에 있는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
▷ 제작순서
-응회암의 벽면을 가늘고 깊게 움푹 파서 모아이의 재료가 되는 긴 바위덩어리를 구분
- 바위덩어리의 뒤쪽이나 아래쪽으로 점점 더 움푹 파 내려가서 용골 부분만으로 전체를 지탱
- 석상이 조심스럽게 만들어지고 얼굴이나 몸통부분의 기본적인 제작이 실시
- 이 단계가 끝나면 용골 부문이 모아이에서 떨어져 나가고 석상은 길고 큰 로프를 써서 언덕의 기슭으로 운반
- 등쪽을 마무리 하고 아후로 운반된다.
▷ 운반방법
해안을 따라 흩어진 마을로 운반 (평균20톤) - 최장 20km운반
-말로이의 흔들이(진자)법
-파벨의 냉장고 법 : 생산지->해안
■ 모아이의 변천상
7세기경, 이스터 섬에 이주한 이주민들은 제단을 만들고 돌이나 나무를 조각한 신상을 모시는 전통을 보유. 수장을 우러러 받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묘비염으로서 모아이를 제작. 초기의 모아이는 높이 2미터 정도로 둥근 얼굴, 둥근 눈을 한 실제으 모습 (재료; 붉은 스코리어=화산암)
10세기경, 정형화 되기 시작.
재료는 라노라라크의 응화암반 사용.
높이는 평균 4미터
가슴을 벌리고 턱을 쑥 내밀며 큰 눈으로 마을을 쏘아보는 모습(수장의 위엄을 상징)
이때부터 붉은색 스코리어로 만든 푸카오를 머리 위에 얹은 것이 나타남.
14~15세기, 모아이 제작의 전성이.
대형모아이 유행(아후테피토크라의 모아이 - 높이 11미터, 추정무게 80톤)
* 16세기경의 미완성 모아이 : 21미터 크기
이 시기에는 무릎을 꿇은 상이나 여성상도 등장.
▷ 모아이의 제작 동기
자연환경이 가혹하고 식량자원 불충분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정신적 구원을 찾게 됨. 초기에는 조상숭배에서 그 길을 찾았고 신앙심을 에너지로 하여 힘든 석상 제작에 몰두(모아이=신앙의 대상이자 마을을 대표하는 상징)
-신앙의 대상
-마을끼리의 권력 투쟁으로 발전
-적개심의 수단이 되어 더 큰 모아이 제작에 몰두
그 결과, 생업소홀, 식량부족, 도둑증가, 마음의 황폐화를 가져옴.
-모아이 문화의 붕괴초래.
▷ 모아이 제작 중단 배경
900개의 모아이 중 350개의 모아이가 라노라라크의 채석장에 미완성품으로 방치(훼손된 것도 있으나 거의 완성되었는데 갑자기 작업 중단한 것도 많다) 16세기말, 모아이 제작 갑자기 중단.
16세기에는 수장에 의해 섬이 통합. 그 이후 내란을 겪고 본격적인 수장제 시대로 돌입
(지배계급 사이의 갈등으로 제작이나 견인이 허용되지 않았던 듯)
1722년, 이 섬을 방문한 로헤벤(유럽인 최초) : 자연이 황폐되고 훼손되어 큰 수림이 없었다고 기록
자연 파괴로 모아이 운반용 목재를 구할 수 없고 수장들간의 투쟁도 극심(전설: 하나우 에에페(=씩씩한 사람들)과 ‘하나우 모모코(=마른 사람들)가 섬의 동쪽 끝에 있는 포이케에서 싸워 ’하나우 에에페‘가 거의 전멸) - 17세기 모아이의 의도적인 파괴행위 : 18세기 후반 -19세기 중엽까지 지속 (연구자의 주장)
격렬한 투쟁의 증거 : 무기로 이용한 흑요석제 석기의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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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1.26
  • 저작시기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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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38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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