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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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예루살렘

3.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성립
3.1 하나의 뿌리
3.2 유대교
3.3 그리스도교
3.4 이슬람교

4. 세 종교, 그리고 예루살렘
4.1 유대교와 예루살렘
4.2 그리스도교와 예루살렘
4.3 이슬람교와 예루살렘
4.4 십자군전쟁과 예루살렘

5. 결론

본문내용

파괴된 채 버려진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교에 대한 경멸의 표시로 성전 내부 가장 신성한 곳에 쓰레기를 쌓아놓은 것에 대해 크게 놀라고 그곳을 깨끗하게 치우게 하였다. 성전 산을 내려온 우마르와 총주교는 성묘교회로 향하는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쯤 무슬림들의 대낮 기도시간이 되었다. 총주교는 우마르에게 교회안에 들어가 같이 기도하자고 권한다. 하지만 우마르는 점잖게 거부하며 “만일 내가 여기서 기도하면 후에 무슬림들이 칼리프가 기도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의 성소’라고 해서 당신들에게서 이 성당을 빼앗아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기도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교회에서 몇 백 미터 물러나 땅바닥에 깔개를 깔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마르는 그리스도교인들 및 유태인들에 대해 무슬림들이 관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본보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마르는 그리스도인과 일종의 계약을 맺는데 그 내용은 이슬람 정부가 그들을 보호하는 대신 그들은 무기를 모두 반환하고 사람 수에 따라 인두세를 징수했다. 그리고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성전을 지을 수 있고, 모스크보다는 높게 지을 수는 없다는 조항을 정해놓는다. 또한 종교의 자유는 허용하였지만 평등성은 부여하지 않았고 각각의 민족 종교적 집단에 반자치국 지위를 부여하여, 자유롭게 자기들이 선출한 지도자 아래 자치생활을 할 수 있게 허용했다. 이러한 관대한 통치 덕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은 크게 환영한다.
688년에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가 즉위하고 성전 산 위에 바위 돔 사원이라는 이슬람 사원을 짓게 한다. 이 사원은 콘스탄틴 대제가 지은 예수부활 교회를 모방했지만, 더 큰 규모를 자랑했고 완전히 이슬람식으로 설계하였다. 바위의 돔이 지어진 자리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곳이며 또한 솔로몬이 지은 성전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신의 성소였다고 한다.
이 사원은 현존하는 이슬람 사원 중 가장 오래된 사원이자 가장 웅장한 사원이다.
709년에는 말리크를 계승한 왈리드 1세 칼리프가 기존에 있던 소박한 목재 모스크를 철거하고 대신 바위의 돔 성전에 걸맞는 거대한 은색 돔을 지붕으로 하는 알 아크샤 모스크를 세웠다. 그 후로 약 400여 년간 예루살렘의 주인은 변하지 않는다.
4.4 십자군전쟁과 예루살렘
십자군의 시초는 1081년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권의 공격에 시달렸고, 제국의 가장 중요한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의 잃을 지경이었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는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탄압한다는 과장된 주장을 하면서 로마 교황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당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를 탈환하라는 연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선동에 설득되었다. 곧 전 서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약 200여 년간 8차례에 걸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전쟁은 삼교 관계에서 매우 불행한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 1096년 봄에 독일 십자군이 원정길에 만난 라인 강변에 사는 유대인들을 학살한다.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적대감 때문이었는데, 이때부터 반 유대교적 감정이 싹트게 된다.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유대인과 무슬림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들 몇 개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무슬림 해적들의 해안 보급선 차단과 육지에서의 잦은 전투로 세력이 약해져서 결국 1187년 10월 십자군은 이슬람의 새로운 지도자 살라딘(Saladin)에게 항복한다. 그리하여 교황 그레고리 8세는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여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여 3차 원정을 떠나지만 이것도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계속되는 원정 실패와 이슬람권의 결집으로 인해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는 1917년까지 8세기 동안 예루살렘은 무슬림 정치 세력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
5. 결론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말과는 달리 아브라함이 가나안 지방에 정착한 기원전 19세기부터 4000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언제나 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지금까지 포위되고, 방어되고, 정복당하고, 파괴되었다가 다시 건축되기를 40차례나 했던 도시다. 예루살렘은 실제로는 작은 도시이지만, 지리적 위치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주변에 있는 나라에게는 중요한 전략의 요충지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를 통한 민족의 단합을 이끌 수 있은 그런 중요한 도시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주변국가에게 있어서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주인이 수차례 바뀌었지만 결국 예루사렘을 차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여러 가지 문명과 인종, 종교가 공존하는 작은 또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이 오랜 공존 속에서 현재 예루살렘 사람들은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작은 도시에서 공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내 것이 옳다는 배타주의를 버리고 다원주의적으로 타 종교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배울 점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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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영 저. 『이슬람』. 서울: 일조각. 2005
Karen Armstrong 저. 배국원 외 역. 『신의역사Ⅰ』. 서울: 동연. 1999
오강남 저. 『세계 종교 둘러보기』. 서울: 현암사. 2004
박양운 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9
후쿠오카 마사유키 저. 『21세기 세계의 종교분쟁』. 서울: 국일미디어. 2001
김상근 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기독교 역사』. 서울: 평단문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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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1.27
  • 저작시기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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