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불교,이슬람교,기독교,유대교 금기음식과 그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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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흰두교의 금기음식과 그 기원
-불교의 금기음식과 그 기원
-이슬람교 금기음식과 그 기원
-유대교 금기음식과 그 기원
-기독교 금기음식과 그 기원

본문내용

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10세기의 노르웨이 왕인 ‘선량한 하콘’의 이야기는 말고기를 먹지 말라는 가르침을 들은 기독교도와 말 도살과 말고기 식용을 계속하는 이교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잘 보여준다. 하콘은 영국에서 자라면서 기독교도가 되었다. 노르웨이로 돌아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전통에 따라 평화와 좋은 계절을 위해 가을 축제 때 말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청을 받았다. 축제의 둘째 날, 사람들은 그가 말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거절했고 말고기 국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타협안이 마련되어, 왕은 말고기가 끓고 있는 솥 안으로 머리를 디밀고 입만 벌렸다. 하지만 그의 신하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 축제가 제대로 시행되어야 그들의 행복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 다음 크리스마스 때 치르는 말의 희생공양에서 하콘은 신을 기리기 위해 말의 간을 약간 먹고 벌꿀 술인지 말고기 국물인지를 대접으로 마셨다. 스칸디나비아의 대부분과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교회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이슬란드인들은 그에 승복하지 않았고 완강하게 변화를 거부했다. 교회는 그들을 파문하기보다는 말고기 먹는 관습을 유지해도 좋다는 면죄권을 부여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말고기 식용 관습이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있다. 실제로 일부 기독교 수도사들까지도 말고기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의 성 골 대수도원의 에케하르트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제공되는 음식에 대해 내린 축복헌사에서 야생마의 고기를 거론한 것이 그 증거이다. 아일랜드 인들이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에도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말고기를 계속 먹었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에 의해 확인되었다. 발린데리 소재의 고고학적 유적에서 발굴된 음식 찌꺼기 중에 말뼈도 있었는데, 이 뼈가 쪼개진 방식이 식용으로 잡아먹힌 다른 가축의 뼈와 동일하다는 사실도 그런 증거 중의 하나이다. 말고기 식용은 덴마트에서도 지속되었으며, 그곳에서는 1520년에 말고기 잔치가 열린 적도 있다. 로버트 버튼은 멜랑콜리의 분석에서 스페인에서는 어린 말을 붉은 사슴이라고 부르며 잡아먹었고, 특히 말라가 주변 지역에서는 해군용 식량으로 공급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17세기 무렵 유럽에서 말고기는 일반적으로 낮은 계층의 음식, 상류층 인사들의 모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으로 간주되었다. 대다수의 유럽인들은 기근이라도 닥치지 않으면 말고기를 먹지 않으려 했으며, 적군에게 포위된 상황에서도 일단 풀부터 뜯어먹다가 가죽 재킷까지 먹어치운 뒤에야 말을 죽이고 고기를 먹었다. 유럽에서 말고기 식용과 희생제물 관습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독일, 영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기타 여러 지역의 초기 인도유럽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었다. 때로는,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말고기가 제물용 음식이었다. 말고기가 일상적인 음식인 지역도 있었다. 어떤 경우이든 으깨지거나 조각난 말뼈와 두개골이 중부와 동부 유럽의 여러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의 동물은 승마용이나 짐 싣기와 수레 견인용으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곧바로 잡아먹힌 것이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에서 말은 승자나 영웅, 혹은 죽은 이를 기릴 때 함께 그려진다. 즉 막대한 특권을 누리던 동물에 걸맞은 대접이다. 기수를 태우거나 전차를 끄는 모습의 말 조각상이 성소, 특히 올림피아에 세워지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이 말을 흔하게 묘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을 제물로 바치거나 제물용으로 도살하는 일은 드물었다. 또 이런 관습에 대한 문학적 비유는 대개 신화적 과거를 포함한 고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사당 유적 발굴지에서 말의 유골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마케네 시대에 간혹 드물게 말 매장이 행해졌을 뿐이다. 가끔 장례용 부조에서 묘사된 말이나 말의 머리가 제례적으로 도살된 동물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반면 사자나 황소, 개와는 달리 말은 독자적인 장례용 동물로 그려지지 않았다. 최소한 기원전 450년에서 기원전 300년 사이의 시기에는 그러했다. 그리스 전설에서는 여러 다양한 신이 말과 관련되어 이씨만 가장 강한 연계를 가지는 것은 포세이돈이다. 그는 말의 신이며 히피오스라 불렀고 말 공양을 받았다. 캄브렌시스의 설명은 고대 켈트인 사이에서 말이 제례와 종교에서 담당하던 역할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이런 상황은 영국 제도뿐만이 아니라 유럽 본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서 지방에 사는 켈트인들의 전승에서 죽은 이들을 내세로 데려가는 존재로 가끔 묘사되기도 하는 말은 웨일즈의 리아논 아일랜드의 마차, 에다인 에크라이데등의 켈트 신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골족의 에포나 였다. 에포나는 로마 기병대의 수호신으로 선택되었으며 에포나의 모습은 골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에포나는 주로 말 두 마리가 마주 보는 사이에 있거나 말 한 마리에 타고 있는 모습으로 기념비에 새겨지거나 비문에서 자주 언급되어 있다 산스크리트어의 아슈바메다와 비슷한 인도유럽어족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일랜드와 로마, 인도에서의 말 공양 관습뿐이다. 웬디 오플레허티는 이 세 가지를 비교하면서 아일랜드에서의 말 공양은 풍요와 양육을 위한 것이었고 로마에서는 군사적인 것이 핵심이었으며 인도에서는 왕실과 신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또 아일랜드와 인도의 말 공양에는 성적인 합일이라는 요소가 들어 있었다. 유럽 북부에서 말고기가 다시금 중요성을 띠게 된 것은 식량 부족이라는 상황 때문이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말고기 판매가 불법이었지만 반 아사 상태의 빈민들은 말고기를 많이 먹었다. 1807년 영국군이 코펜하겐을 포위했을 때 덴마크 인들은 절망감 속에서 말을 잡아먹었는데. 포위가 풀리고 식량부족이 해소된 후에도 그런 관습은 계속 남았다. 말고기의 판매는 1841년뷔르템베르크에서 합법화되었으며, 그 뒤 수십 년 사이에 바이에른 , 바덴, 하노버, 보헤미아, 작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프러시아 등지에서도 합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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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1.28
  • 저작시기2006.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38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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