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의 개념적 이해와 시대별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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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산수화
가. 산수화란?
(1) 산수화의 정의
(2) 산수화의 기원
(3) 산수화의 주요 주제
나. 시대별 산수화
(1) 삼국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산수화
(2) 고려시대의 산수화
(3) 조선왕조 초기의 산수화
(4)조선왕조 중기의 산수화
(5) 조선후기의 산수화

본문내용

나 안주해 버리려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유배기의 매화 그림
그러나 <홍매도 대련>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성보다는 오직 매화 자체에서 느껴지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몰입했다. 붓에 먹을 묻혀 툭툭 찍어 내리듯 표현된 매화 등걸은 오랜 세월을 절치부심하며 기다려온 용의 비늘처럼 까칠하다. 용의 비늘을 뜯어내어 만든 듯한 제화시 끝에 ‘소향설관(小香雪館)’이란 관지가 있어서 유배기인 1860대 초반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독기 서린 바다, 적막한 물가, 황량한 산과 고목 사이에 달팽이집같이 작은 움막 속에서 움츠려 떨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한묵의 능사에 손을 대어 온갖 돌과 한 떨기 난초를 때때로 그려내었다. 되는 대로 붓을 놀리고, 먹을 튀겨 빗물처렴 흩뿌려서 돌은 흐트러진 구름처럼, 난초는 젖혀진 풀처럼 그리니 자못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애오라지 스스로 좋아할 따름이다.”
1851년(철종2년) 63세의 나이로 영광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된 조희룡이 쓴 글이다. 그 곳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집 뒤의 황량한 산과 문 앞의 고래파도가 일렁이는 가운데 크고 작은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세월을 견뎠다.
“시를 지으매 모두 위태롭고 고독하고 메말라 부드러운 글자와 여유로운 글귀의 빼어나고 활발하고 명랑하고 윤택한 것이 없다. 그리하여 시를 덮어 두고 그림에 들어갔다. 손이 가는대로 칠하고 그어 먹기운이 생동하여 가슴 속의 불평한 기운을 표출해대니, 문득 소슬하고 높은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이 일체의 고액을 극복해가는 법인 것이다.”
그는 ‘눈 쌓인 바닷가에서 문을 닫고 거북처럼 움츠려 있으면서 날마다 매화 몇 장을 그려서 울적한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바닷가 산 산기슭에 살면서 고요히 나무, 돌, 구름, 노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늙은 나무와 여읜 돌은 초묵(蕉墨)이 아니면 그 고경(古勁)하고 창로(蒼老)한 의경을 표현할 수 없었다. 변화하는 구름과 환상적인 노을은 담묵이 아니면 착잡하게 펼쳐지고 점점이 엮어진 뜻을 얻을 수 없을 성싶었다.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마음을 그림으로 채워나갔다.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와 울분을 <세한도>라는 작품 속에 단색의 먹으로 풀어내고 있을 때 조희룡은 홍매로 격정을 퍼부었다. 때로는 ‘은하수에서 쏟아 내린 별무늬같고 오색 빛깔 나부산의 나비를 풀어 놓은 것 같은’ 매화를 그렸다.
임자도 유배 이후에는 매화와 난을 바위와 함께 그리기도 하였다. 그 곳에 먼저 유배와 있던 김태라는 사람과 친해진 결과였다. 회령부사를 지냈던 김태는 수석에 취미가 있어 조희룡의 눈을 트게 해준 사람이었다.
조희룡의 매화 사랑
조희룡의 매화 사랑은 극진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을 달고 침실에는 매화 병풍을 둘렀으며 매화차를 마셨다고 한다. 또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시를 썼다고 하니, 삶 자체가 바로 매화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귀양살이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매화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조희룡 의해 그려진 홍매도는 조선 말기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특히 한 그루의 매화를여러 폭의 병풍에 펼치듯이 그리는 그림 형식은 조희룡의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조선 말기 매화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후 허련, 유숙, 장승업 등에 의해 이런 형식의 병풍식 매화가 제작되었다. 장식적이면서도 대작인 병풍식 매화가 많이 그려졌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인 수요가 많았음을 말해준다.
(라) 장승업
조선 말기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1843~97). 중세적 전통 세계에서 근대 세계로의 변환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던 1870~90년대의 개화기 서울 화단의 최고 명수로 손꼽혔다. 장승업은 주로 무반을 배출했던 희소한 본관인 대원(大元) 장씨였다. 대원은 황해도 안악에 있는 지명으로 그의 출신지가 황해도 모처였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무반 출신이었다고는 하나 조실부모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 먹을 것을 찾는 신세로 서울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승업이 정통화의 전문 화가로 비약하고 이름이 날리게 된 계기로 변원규와의 만남으로 이루어 진다. 변원규의 집에서 명화들을 통해 자신의 창작력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그로 인해 김은호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곳을 자주 방문했을 당시의 유숙과 같은 명화원과 사제의 인연을 맺으며 더욱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인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장승업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자 도화서가 폐지된 후 그 업무를 물려 받은 규장각의 대령 화원으로 차출되어 <남극노인도>와 같은 왕실용의 세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장승업은 중세적 교양과 문학성을 점차 배제하기 시작한 이러한 신화풍의 수용 이외에도 입체적인 음영법과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적인 사용을 통해 근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정물화 계통의 기명절지도 양식을 도입해 완성시켰다. 선지의 보급과 이에 적합한 부드럽고 긴 양털 붓 기법의 개발과 함께 갈대와 기러기를 소재로 그린 노안도를 새롭게 유행시키기도 했다.
(마) 김수철의 이색산수화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사익(士益, 혹은 사앙). 호는 북산(北山). 본관은 분성(盆城, 혹은 김해). 산수와 화훼(花卉)를 즐겨 그렸으며, 초기에는 정형화된 남종화법에 의한 화보풍(畵譜風)과 김정희파 화가들의 회화세계와 상통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후기에는 왜곡된 형태와 청신한 담채(淡彩), 독필(禿筆)과 유탄소묘(柳炭素描) 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감각의 개성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특히 그가 후기에 보여 주었던 이색적인 화풍은 윤제홍(尹濟弘)의 전통을 발전시킨 것으로, 김창수(金昌秀)의 작품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동향을 대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근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품으로 《계산적적도(溪山寂寂圖)》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산사만종도(山寺晩鐘圖)》 《강산매림도(江山梅林圖)》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매우행인도(梅雨行人圖)》 등이 있다.
<송계한담도>
  • 가격5,000
  • 페이지수30페이지
  • 등록일2007.11.29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3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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