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태평양전쟁의 길)
1. 미국과 중국의 반일체제(1940년대의 일본외교)
2. 유럽정세가 아시아에 미친 영향
3. 동아신질서의 건설
4. 독일에 대한 과신과 남진정책
5. 독선적 대동아(大東亞) 구상
6. 독일의 소련진격파문
제 1 장 미일전쟁의 결말
1. 대국일본의 소멸 (패전시기)
2. 전후의 세계 (패전이후)
3. 미군 점령 하의 일본
제 2 장 일본외교의 재출발
1. 냉전의 군사화
2. 평화조약과 샌프란시스코 체제
3. 조선특수(朝鮮特需)와 일본의 무역
제 3 장 평화적 공존의 발아
1. 1950년대의 세계
1. 미국과 중국의 반일체제(1940년대의 일본외교)
2. 유럽정세가 아시아에 미친 영향
3. 동아신질서의 건설
4. 독일에 대한 과신과 남진정책
5. 독선적 대동아(大東亞) 구상
6. 독일의 소련진격파문
제 1 장 미일전쟁의 결말
1. 대국일본의 소멸 (패전시기)
2. 전후의 세계 (패전이후)
3. 미군 점령 하의 일본
제 2 장 일본외교의 재출발
1. 냉전의 군사화
2. 평화조약과 샌프란시스코 체제
3. 조선특수(朝鮮特需)와 일본의 무역
제 3 장 평화적 공존의 발아
1. 1950년대의 세계
본문내용
. 일본의 언론도 필연적으로 우경화하고 소련 및 중국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넓은 의미에서의 아메리카나제이션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많은 미국문화들이 건너오게 되었다.
1952년 前後의 일본에게는 전략적, 경제적인 면 뿐 만 아니라 문화적, 사상적으로도 미국이 가장 가까운 나라로 인식되었던 것은 분명하며 소련이나 중국과의 접촉이 제한되어 있었던 만큼 미국의 중요성은 더욱 실감되었다.
제 1 장 미일전쟁의 결말
1. 대국일본의 소멸 (패전시기)
2. 전후의 세계 (패전이후)
3. 미군 점령 하의 일본
제 2 장 일본외교의 재출발
1. 냉전의 군사화
2. 평화조약과 샌프란시스코 체제
3. 조선특수(朝鮮特需)와 일본의 무역
제 3 장 평화적 공존의 발아
1. 1950년대의 세계
-국제적 상황 : 1950년대의 세계는 미소간의 군사적 대결이 한층 강화된 냉전의 시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냉전의 안티 체제로서 평화공존론도 출현하여 표면적으로는 모순 된 시기였다. 또한 미소 양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세계가 출현하여 자기주장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 한편에서는 냉전이 극단적으로 긴장되고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종결시킬, 혹은 그것을 넘어선 국제 질서의 모색이 시작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의 양 진영 : 1950년대는 미국과 소련 양진영의 군사적 대립이 더욱 심해졌다. ex) missile gap
-양진영의 군비확장이 초래한 결과 : 1950년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지구 북반구를 파멸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미소양국의 핵무장이 군사 균형의 도를 넘어서 인류의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무장을 하는 이유는 다음에서 설명하는 제한전쟁론으로 이어진다.
-제한전쟁론 : 이것 역시 1950년대 특징 중의 하나로서 미소양국은 핵전쟁이 아니라 재래무기와 스파이를 이용해서 싸우거나 제 3국을 이용하는 대리전쟁을 하게 된다. 이것은 1950년대의 예가 현저하게 많았다.
-미소의 힘의 대결이 국제 국제관계를 규정하고 있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유럽뿐 아니라 그 이외의 지역을 포함해 말하자면 전 세계가 군사화 되어갔다.
-NATO설립되고 그리스, 터키가 연이어 가입, 서독도 참가하여 재군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대응하여 동구권에서는 1955년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어 소련의 병력주둔이 반항구적으로 되었다. 서방 진영에서는 미국지휘관 아래 NATO군대가 편성되었다. 그밖에도 중근동에서의 바그다드 동맹과 동쪽에서는 CENTO가 형성되었으며 미국, 영국, 파키스탄에서는 SEATO가 조직되어졌다. 미국은 타이완과 한국과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되면서 1960년이 상태가 긴장상태를 보이게 된 것이다. 세계각지는 마치 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려는 것처럼 동요했지만 대전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미소 대립이라는 틀은 있어도 그것은 군비증강만을 초래했다.
조선전쟁이후의 세계적 측면
1953년 스탈린 사후에 평화공존이라는 개념이 소련에서 사용되기 시작하고 미국 쪽에서도 냉전의 휴전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자는 군사화 된 세계가 반드시 전쟁의 필연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 혹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르친다. 후자는 양국의 군비확장은 계속 되었으나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휴전 또는 공존이 이야기 된 것은 양국이 핵무장화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간에 필연적으로 전쟁이 발생한다고는 볼 수 없는 인식이 높아진 것이다.
- 이때에는 평화적 공존이 국제정세에서 환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미소의 양 블록 간에 군사이외에 레벨에서의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소양국이 핵실험 정지를 향해 교섭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군축을 협의할 단계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핵무기 제조를 위한 실험을 정지하는 것은 군축을 향한 제일보이다. 예비교섭 1958년이고 미소협정이 체결 된 것은 그 5년 후이다. : 이때 핵실험 중지를 강하게 요구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중립주의라고 한다.(인도, 이집트 등의 신흥 국가)
제 3세계의 대두
-중립주의 : 냉전체제를 대신해 반둥체제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평화 5원칙’을 포함한 10원칙을 채택, 핵실험의 정지를 비롯하여 군비축소, 경제원조 등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미소 양국도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며 이것은 세계인구의 2분의 1을 대표하는 제 3세계의 대두였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형성이었으며 경제발전이 중요했다.
-제 3세계의 대두에 관한 중국의 활약 :1950년 중국과 동맹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1955년 전후에는 유연성 있는 외교를 취하며 중립전책을 취하는 인도 등과 보조를 맞춰 미국에 대해서도 평화공존을 호소했다.
-문제점 : 반둥체제는 정착하기 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며 미소의 군사적 대립에 의해 정의된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는 변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 미소의 군사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은 1958년이 되자 평화공존이 아니라 다시 반미주의를 선명히 했다. 그래서 반둥정신도 수년 후에는 퇴색해 버렸다.
-결과 : 결과적으로 반둥회의는 미소냉전과 세계의 군사화에 큰 변화를 초래할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1950년대 반둥적인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무시할 수 없다. 국제관계에 있어 하나의 획기적인 개념을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근대화론 : 1950년대의 미국에서의 근대화론은 미소의 대결이라는 틀 속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소련진영에 굴복하지 않도록 그들의 경제발전을 원조하도록 한다는 전략적 의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냉전이라는 현실 속에서 제 3세계를 서방측에 붙들어 두는 것은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원조와 기술제공을 통해 발전도상국, 신흥국가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자유민주주의 발전’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1950년대의 중요한 유산이며 미소양진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이미지와 병행해서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952년 前後의 일본에게는 전략적, 경제적인 면 뿐 만 아니라 문화적, 사상적으로도 미국이 가장 가까운 나라로 인식되었던 것은 분명하며 소련이나 중국과의 접촉이 제한되어 있었던 만큼 미국의 중요성은 더욱 실감되었다.
제 1 장 미일전쟁의 결말
1. 대국일본의 소멸 (패전시기)
2. 전후의 세계 (패전이후)
3. 미군 점령 하의 일본
제 2 장 일본외교의 재출발
1. 냉전의 군사화
2. 평화조약과 샌프란시스코 체제
3. 조선특수(朝鮮特需)와 일본의 무역
제 3 장 평화적 공존의 발아
1. 1950년대의 세계
-국제적 상황 : 1950년대의 세계는 미소간의 군사적 대결이 한층 강화된 냉전의 시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냉전의 안티 체제로서 평화공존론도 출현하여 표면적으로는 모순 된 시기였다. 또한 미소 양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세계가 출현하여 자기주장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 한편에서는 냉전이 극단적으로 긴장되고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종결시킬, 혹은 그것을 넘어선 국제 질서의 모색이 시작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의 양 진영 : 1950년대는 미국과 소련 양진영의 군사적 대립이 더욱 심해졌다. ex) missile gap
-양진영의 군비확장이 초래한 결과 : 1950년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지구 북반구를 파멸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미소양국의 핵무장이 군사 균형의 도를 넘어서 인류의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무장을 하는 이유는 다음에서 설명하는 제한전쟁론으로 이어진다.
-제한전쟁론 : 이것 역시 1950년대 특징 중의 하나로서 미소양국은 핵전쟁이 아니라 재래무기와 스파이를 이용해서 싸우거나 제 3국을 이용하는 대리전쟁을 하게 된다. 이것은 1950년대의 예가 현저하게 많았다.
-미소의 힘의 대결이 국제 국제관계를 규정하고 있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유럽뿐 아니라 그 이외의 지역을 포함해 말하자면 전 세계가 군사화 되어갔다.
-NATO설립되고 그리스, 터키가 연이어 가입, 서독도 참가하여 재군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대응하여 동구권에서는 1955년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어 소련의 병력주둔이 반항구적으로 되었다. 서방 진영에서는 미국지휘관 아래 NATO군대가 편성되었다. 그밖에도 중근동에서의 바그다드 동맹과 동쪽에서는 CENTO가 형성되었으며 미국, 영국, 파키스탄에서는 SEATO가 조직되어졌다. 미국은 타이완과 한국과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되면서 1960년이 상태가 긴장상태를 보이게 된 것이다. 세계각지는 마치 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려는 것처럼 동요했지만 대전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미소 대립이라는 틀은 있어도 그것은 군비증강만을 초래했다.
조선전쟁이후의 세계적 측면
1953년 스탈린 사후에 평화공존이라는 개념이 소련에서 사용되기 시작하고 미국 쪽에서도 냉전의 휴전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자는 군사화 된 세계가 반드시 전쟁의 필연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 혹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르친다. 후자는 양국의 군비확장은 계속 되었으나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휴전 또는 공존이 이야기 된 것은 양국이 핵무장화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간에 필연적으로 전쟁이 발생한다고는 볼 수 없는 인식이 높아진 것이다.
- 이때에는 평화적 공존이 국제정세에서 환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미소의 양 블록 간에 군사이외에 레벨에서의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소양국이 핵실험 정지를 향해 교섭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군축을 협의할 단계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핵무기 제조를 위한 실험을 정지하는 것은 군축을 향한 제일보이다. 예비교섭 1958년이고 미소협정이 체결 된 것은 그 5년 후이다. : 이때 핵실험 중지를 강하게 요구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중립주의라고 한다.(인도, 이집트 등의 신흥 국가)
제 3세계의 대두
-중립주의 : 냉전체제를 대신해 반둥체제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평화 5원칙’을 포함한 10원칙을 채택, 핵실험의 정지를 비롯하여 군비축소, 경제원조 등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미소 양국도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며 이것은 세계인구의 2분의 1을 대표하는 제 3세계의 대두였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형성이었으며 경제발전이 중요했다.
-제 3세계의 대두에 관한 중국의 활약 :1950년 중국과 동맹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1955년 전후에는 유연성 있는 외교를 취하며 중립전책을 취하는 인도 등과 보조를 맞춰 미국에 대해서도 평화공존을 호소했다.
-문제점 : 반둥체제는 정착하기 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며 미소의 군사적 대립에 의해 정의된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는 변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 미소의 군사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은 1958년이 되자 평화공존이 아니라 다시 반미주의를 선명히 했다. 그래서 반둥정신도 수년 후에는 퇴색해 버렸다.
-결과 : 결과적으로 반둥회의는 미소냉전과 세계의 군사화에 큰 변화를 초래할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1950년대 반둥적인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무시할 수 없다. 국제관계에 있어 하나의 획기적인 개념을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근대화론 : 1950년대의 미국에서의 근대화론은 미소의 대결이라는 틀 속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소련진영에 굴복하지 않도록 그들의 경제발전을 원조하도록 한다는 전략적 의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냉전이라는 현실 속에서 제 3세계를 서방측에 붙들어 두는 것은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원조와 기술제공을 통해 발전도상국, 신흥국가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자유민주주의 발전’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1950년대의 중요한 유산이며 미소양진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이미지와 병행해서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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