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권력공고화과정과 그에 따른 분단의 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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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1) 김일성의 생애
2) 이승만의 생애

2. 김일성의 권력공고화 과정
1) 당시 한반도의 상황
2) 해방 직후 김일성의 모습
3) 권력 장악 과정
4) 소련과 김일성

3. 한국전쟁과 김일성의 권력 장악
1) 무정의 제거
2) 허가이의 도전과 대립
3) 박헌영의 도전과 숙청

4. 결론

본문내용

한에 형성되어있던 4개의 계파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 빨치산파
들이 서로 부인하고 있는 가운데 시의 적절하게 소련파의 박창옥이 국내파를 공격해 주었고, 김일성은 각 계파들 간의 불화를 적극적으로 해결했다.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1주일이 지난 53년 8월 3일에는 평양에서 북한 역사상 가장 큰 정치재판이 벌어졌다. 그 재판에서는 이승엽을 비롯한 12명의 공모자 이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배철, 윤순달, 이원조, 박형복, 조용복, 맹종호, 설정식 이상 12명. 이들은 모두 한국공산주의운동의 베테랑으로서 해방 후에 남조선노동당 고위지도자로 활약한 바 있음
들이 기소되어있었다. 이들의 죄목은 스파이활동, 남한의 민주 세력에 대한 무차별적인 파괴와 학살행위, 무력으로 공화국 정부 전복이었다. 이 죄목들은 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지만 결국 재판을 통해 사형2명, 무기징역2년의 선고를 받았고, 남로당 계열을 북한 정치권력 속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남로당의 핵심적 중추였던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이들의 재판이 모두 끝나고 약 2년이 지난 후에 열렸다. 박헌영의 죄목은 미국의 첩자노릇, 국가전복 도모했다는 등의 이유로 국내파의 쇠퇴가 예상되었다. 결국 박헌영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고, 이승엽과 박헌영이라는 거대 지도자를 잃은 국내파는 손쉬운 숙청의 대상이 되었고, 사실상 50년 대 후반에는 존재의 의의를 상실했다. 이종명 “이승만과 김일성의 정치적 리더십 비교 : 해방 전후시기 분단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2006. 96p
이로써 김일성은 경쟁자들의 제거에 성공하고 일당 독재체제 구축에 노력하였고, 결국은 김일성 독재체제 구축을 완성하게 된다.
제 4장 결론
김일성은 해방 직후 그리 큰 영향력을 갖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 내에는 수많은 정치적 지도자-이승만, 박헌영, 김규식, 여운형 등-들이 많이 존재하였고, 수많은 정당과 단체들이 존재하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33세의 청년 김일성은 소련이라는 막강한 지원 세력을 등에 업고 북한 내에서의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때론 직접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도 했고, 더 큰 자신만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힘을 모으기도 했다. 또한 그는 김일성만의 리더십을 발휘하였으며, 한국전쟁이라는 한반도 역사상 엄청난 파장을 발생시켰던 큰 사건의 중심에 있기도 하였고, 자신의 권력에 위협에 될 만한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가며 김일성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 하였으며, 이는 분단을 현재까지도 지속하도록 상황을 이끌었다. 남한의 이승만과 대립적인 위치에서 이승만이 남한을 장악하고 장기 집권을 준비할 때 북한의 김일성 역시 같은 취지의 행동을 북한에서 그대로 행하였다. 김일성의 권력공고화는 한국전쟁이라는 특수성과 최대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남로당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박헌영의 제거로 확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도 김일성은 경쟁세력이나 반대 세력, 그리고 잠재적 위협세력에 대해 많은 처형을 감행하지만, 그는 박헌영이라는 커다란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정권장악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북한은 김일성의 나라가 되었고, 그 사이 남한은 반공주의가 사회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승만이 장기 집권의 시도로 독재자가 되고자 했고, 그에 따라 북한과 남한은 서로 반대를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한에서 독재체제를 구축하려던 이승만이 민주화의 요구로 하야하게 되고 극단적 반공주의자인 박정희가 다시 장기 집권함에 따라 북한과 남한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고, 통일의 논의는 힘들어졌으며, 평화구축에 대한 노력조차 하기 힘든 관계를 만들어 분단을 더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자신의 권력유지와 권력투사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 분단을 타파하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이 남북 관계의 유연화에 많은 효과를 주었고, 많은 결과들이 나오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남북 간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남북한이 평화를 구축하고 더 나아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남북한의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신뢰 없는 회담과 평화논의는 무의미하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꾸준히 구축함으로써 남북한 간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남북한의 이질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서로 정부를 세우고 국가를 운영함에 따라 서로 다른 이념과 적대시는 위에서 말했듯이 남과 북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했다. 남한과 북한은 등을 맞대고 전력질주를 했을 만큼 남과 북의 이질화는 심각하다. 언어에서부터 생활 및 문화에까지 널리 퍼진 이질성을 극복해야만 민족적 통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육로를 통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의 개방, 그리고 꾸준한 문화교류 등은 남북한의 관계 개선과 국민통합에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남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 이후 한반도가 오늘날과 같이 분단된 지는 약 60년이 되었다. 이제 통일이라는 결과물에 대해 낙관적인 기대를 가질 때를 이제는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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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표욱 / <이승만과 한미외교>, 중앙일보사 1996
양호민 외 저 / <한반도 분단의 재인식>, 나남 1993
박명림 /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출판 2002
김동춘 /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서대숙 /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한승인 / 「독재자 이승만」, 일월서각 1984
김정원 /「分斷韓國史」 동녘 1985.
“분단의 배경과 고착화” 충남대학교 보운지 편집실 1988
한공택 / “이승만 집권기 분단고착화와 권위주의적 지배에 관한 연구” 부산정치학회보 1996
이종명 / “이승만과 김일성의 정치적 리더십 비교 : 해방 전후시기 분단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2006
정영희 / “김일성 장기집권의 요인” 政治論叢 1995
허정범 / “북한의 숙청연구”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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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15
  • 저작시기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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