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 정리(유가 묵가 도가 명가 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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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제자백가의 유래와 정의

2. 시대적 배경

3. 공자와 맹자의 사상(유가)

4. 양주와 묵적의 사상(묵가)

5. 노자와 장자(도가)

6. 변론의 철학(명가)

7. 한비의 사상(법가)

8. 정리 및 비평

9. 참고자료

본문내용

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법"이었다. 그는 사회가 모두 반드시 "법"을 준수해야 하며 누구든지 "법"을 위반하면 징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법령을 "명(名)"이라 하고 법령에 의거하여 상벌을 가하는 것을 "형(刑)"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형명지술(刑名之術)"이다.
한비는 또한 중앙집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술"도 필요한데, "술"은 군주가 "법"에 의거하여 관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법"은 공개된 것이고 "술"은 은폐된 것이며 "술"이 있으면 국왕은 정권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법"과 "술" 외에도 한비는 "세"를 주장하였다. 이른바 "세(勢)"란 바로 정권이며 "승세(乘勢, 세를 타는 것)"는 바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는 신도의 "중세(重勢)"설을 수용하고 발전시켜 "세(勢)"를 "자연지세(自然之勢)"와 "인위지세(人爲之勢)"로 구분하고 "인위지세(人爲之勢)"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와 "법"을 결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공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한비는 중앙집권적 봉건 전제정권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의 사상을 통일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직 법가만을 존중하고 기타 학설을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비의 주장에 의거하여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에 강력한 법가정책을 추진하고 유가 등의 학파들에게는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비의 학설은 선진(先秦)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진시황을 통하여 정치상에서 법가사상의 통치를 현실적으로 실현시켰다. 그러나 법가사상은 비록 진시황이 중국 최초의 통일된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를 수립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결코 진왕조의 통치를 오랫동안 지속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진시황과 진2세(秦二世)는 단순히 법가정책을 추진하면서 가혹한 형벌과 법률을 시행하고 이단적인 학설 세력과 백성들에 대하여 잔혹한 탄압을 가했기 때문에 오히려 진왕조의 신속한 멸망을 초래하였다.
한(漢)왕조가 수립된 이후 무제(武帝) 시대에는 진왕조의 정책과는 상반되게 "백가(百家)를 배척하고 오직 유학만을 존중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여 유가사상은 관학(官學)의 정통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법가학파는 소실되었으며, 이후 중국에서는 어떤 새로운 유명한 법가학파도 다시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가학파는 비록 소실되었지만 법가사상은 결코 소실되지 않았다.
그것은 봉건 통치정권을 강화하는데 여전히 유용하였기 때문에 역대 봉건 통치계급에 의해 계승되어 왔으며, 유가사상과 결합하여 각각 부드러움과 굳셈, 겉과 안이 되어 상호 보완하면서 봉건 지주계급이 중국을 통치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법가사상은 일종의 정치학설로써 그 기본 내용은 이미 현대에 적합하지 않은 통치사상이지만, 고대 중국의 중요한 사상 문화 유산으로써 아직까지 많은 영역에서 계발 가치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8. 정리 및 비평
모든 사상가들의 학설은 각자의 정치, 사회상황과 지역적 특성에 의해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알아보았던 학파들의 사상적 기초가 형성지역과 각 철학자들의 사회적 위치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東周시대의 문화의 중심은 특히 세 나라 魯, 宋, 楚를 말할 수 있다. 魯나라는 周公이 다스렸던 곳으로 周나라 다음 가는 문화중심지를 이루었고, 宋나라는 殷나라의 後孫들이 다스렸던 곳으로 殷의 文化傳統을 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楚나라의 경우는, B.C.520년에 周 景王의 아들 朝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그에게 가담하였던 여러 관리들과 종족들을 거느리고 왕실에 있던 모든 典籍들을 싸가지고 망명한 곳이었다. 이를 계기로 楚나라는 오랑캐의 나라에서 일약 중국문화의 한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던 것이다.
魯나라에서 인의를 설교하여 周初의 封建制度를 復興시키려 애쓴 공자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오고, 宋나라에서는 鬼神을 推仰하고 兼愛와 勤儉을 力說하며 以前의 封建秩序를 반대하고 庶民의 입장을 擁護하는 묵자가 나왔으며, 楚나라에서는 노자의 도가사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노자의 무위자연의 사상이나 柔弱을 주장하는 태도 등은 그대로 중국 남방의 낭만적인 기질의 소산이라 할 수가 있다. 또한 묵자가 周나라의 封建秩序를 부정하던 입장의 밑바닥에는 周나라에게 멸망당했던 殷나라 後孫들의 감정이 서려있듯이, 노자가 일체의 封建體制와 價値를 부정하는 태도 속에는 오랑캐나라 사람으로서의 중원에 대한 반감도 작용한 것이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빈궁과 압제에 시달리고 전쟁에 상처입은 고대 중국의 인민이 겪는 불행과 수난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 모두가 統治者들을 비판하고 統治者들의 수탈과 압제를 금지 내지는 경감시키려 했고 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이 사상가들의 학설은 다분히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지만, 유가는 묵자도 말하였듯이 너무나 형식적이고 비생산적이다. 즉 묵가의 久喪과 厚葬은 그와 현대인에게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점이다. 도가는 결과적으로 爲我思想과 厭世主義 이론을 마련하여 주었다. 하지만 어느 중국인 철학자가 말하였듯이, 도교는 유교의 자기 만족적 군집성에 대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대응물'로써 충분하였다. 도가사상가인 楊朱의 爲我思想도 어느 정도까지는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라 본다.
묵자는 人類에게 天(하늘)의 신격화된 上帝(하느님)를 선물하였다. 19세기 중엽 James Legge라는 학자는 일찌기 묵자를 論及하면서 그의 兼愛의 학설을 그리스도의 博愛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上同論은 다분히 엄격한 전체주의의 位階意識을 품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Hitler가 그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 말한 전체의 國家組織을 완성시키는 원칙은 지배자 개개인의 하급자에 대한 權威와 상급자에 대한 義務일 수밖에 없다'라는 어감을 느끼게 한다. 이들의 학설 속에 비친 장, 단점을 현대사회에 반영시킬 수만 있다면 더욱 값진 인생관을 정립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9. 참고자료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현음사
풍우란, 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
이강수, 중국 고대철학의 이해, 지식산업사
박일봉, 중국 사상사, 육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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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10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6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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