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여성에게 미친 영향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전개
1. 제1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배경
2.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1)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쟁탈
2) 영국과 독일의 경쟁심화
3) 발칸에서의 분쟁
4)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
3. 전쟁의 발발
4. 전쟁의 전개 상황
5.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6. 1차 대전의 경과
7. 1차 대전의 의미

Ⅱ. 제1차 세계대전이 정치에 끼친 영향
1.국제 연맹의 탄생
1) 윌슨의 14개 조항
2) 평화회의의 개최
3) 미국의 입장
4) 국제연맹의 창설
2. 베르사유 체제
1) 베르사유 체제
2) 배상금 문제
3) 다우즈案
3. 변화한 유럽의 지도
4. 각국의 정치적 변화
1) 독일
2) 영국
3) 프랑스
4) 오스트리아
5) 러시아

Ⅲ. 제1차 세계대전이 경제에 끼친 영향
1. 제1차 세계대전의 경제적 혼란
1) 물질적 파괴
2) 경제관계의 단절과 혼란
3) 외국무역의 붕괴
4) 해외시장의 상실
5) 세계 농업 균형의 파괴
6) 해운업 및 기타 서비스업의 소득 감소
7) 해외투자 소득의 감소
8) 인플레이션
2.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혼란
1) 파리평화조약(the Peace of Paris)으로 인한 혼란
① 독일의 치욕
② 경제적 민족주의
③ 배상금문제
2)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혼란
3) 나라별 경제 변화
① 영국
② 프랑스
③ 독일
④ 일본
⑤ 미국

Ⅳ. 제1차 세계대전이 사회에 끼친 영향
1. 국제연맹
1) 국제연맹의 활동과 전후처리
① 루르 점령
② 도즈안과 영안
③ 로잔 배상 협정
2) 국제연맹의 한계
① 나치의 베르사유 체제 타파
② 이디오피아 전쟁
2. 전체주의
1) 전체주의 배경원인
2) 전체주의의 대두
① 이탈리아의 파시즘
② 독일의 나치즘
③ 일본의 군국주의
3) 전체주의 발생원인
① 자유주의적 자본기구의 동요
②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요인
3. 세계 1차 대전 직후의 사회 - 독일을 중심으로
1) 대공황 이후의 사회 - 세계경제의 붕괴
2) 독일의 경제상황
3) 사회, 문화적인 측면의 변화
4) 철학 및 사상적인 측면
5) 문화적 측면
4. 1차 세계대전이후의 각국의 사회변화
1) 미국
① 1920년대의 밝은 경기
② 이민문제
③ 문화의 충돌
④ 세계대공황
2) 영국
① 경기침체
② 대영제국
3) 프랑스
4) 독일
① 공화국의 성립
② 국가의 구조
③ 국민주권
④ 기본권과 사회권
⑤ 바이마르 헌법의 과제와 그 제도적 결함
4) 러시아
① 소비에트사회주의 연방공화국
5. 맺음말

Ⅴ. 제1차 세계 대전이 문화에 끼친 영향
1. 전체주의
2. 철학
3.선전
4. 인종우월
5. 사상개조(세뇌)
6. 예술
7. 의의

Ⅵ. 제1차 세계 대전이 여성에 끼친 영향
1. 1차 대전기의 여성
1) 반전 평화 운동
2) 여성의 신체와 노동에 대한 착취
2. 전쟁이 끝난 후
1) 사회 변화와 신여성의 등장

본문내용

과 동등한 사회, 경제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감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이른바 신여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대가 탄생한다. 전후 미국을 필두로 한 소비 수요의 증대는 새로운 사회적 풍조를 불러 일으켰다. 미국은 400만에 이르는 제대 군인에게 퇴직금을 지급했으며 이는 각종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증폭시켰고 각종 소비재 상품에 대한 투자가 가속도 효과를 거두었다.
프랑스 역시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다. 독일이 지불한 전쟁 배상금에 의지하여 프랑스의 경제 재건 사업은 1920년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70만 명의 전시 노동자들이 평화 산업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중공업 생산의 본산이었던 북부 지방이 초토화되었음에도 프랑스는 전시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산업 근대화와 테일러리즘을 바탕으로 1920년대 초반 다른 어떤 경쟁국보다도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하여 1924년 프랑스의 산업 총생산 규모는 1914년 수준까지 회복되었고 1929년에는 1913년과 비교하여 40%나 성장하였다. 그리고 남성 노동자에 비하여 훨씬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지만 1921년 전체 유급 노동력의 40%를 점하고 있던 여성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었다.
영화 역시 소비 사회를 촉진하였다. 미국에서 스타급 영화 배우는 소비 사회를 반영했을 뿐 아니라 빅토리아풍의 도덕적 가치를 거부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일조하였다. 맥지 벨라미와 클라라 바우, 요한 크로포드로 대표되는 1920년대의 여성 스타는 육체적 자유와 에너지, 독립성 등을 가지고서 현대 여성을 대표하였다. 프랑스에서도 영화는 라디오와 함께 1920년대를 풍미한 문화적 유행의 하나였고 1920년대 재즈 열풍과 함께 도입된 아메리카니즘(재즈 밴드, 칵테일 등)은 흑인 재즈와 댄스의 스타인 조세핀 베이커에 대한 열광에서 알 수 있듯 프랑스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25년 라 레뷰 네그르 la Revue negre에 10살의 나이로 데뷔한 조제핀 베이커는 1920년대 프랑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라(全裸) 혹은 반라(半裸)인 채로 아기 표범을 동반하거나 목에 뱀을 휘감고 무대에 등장했던 베이커는 이국 수퍼 스타의 역할을 해냈으며 2차대전기에는 레지스땅스로 활동하였다. 조제핀은 1975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청중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변화는 여성의 의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전후 좀더 기능적인 짧은 치마와 불편한 코르셋을 대체하는 가터 벨트가 유행했다. 그리고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와 흰 실크셔츠와 넥타이, 수트, 납작한 가슴 역시 이 시대를 풍미한 유행이었다.
부르주아 여성들은 가외 활동에서 좀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1914년까지만 해도 어머니들에게 거부되었던 것과는 달리 전쟁이 끝난 뒤 젊은 여성들은 더 이상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도 외출할 수 있었고 이성의 병실에 문병을 갈 수도 있었다. 전통적인 부르주아적 도덕 관념 역시 부식되었다. 1920년대의 소비사회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윤리인 부족, 자제, 희생, 검약과는 대척점에 있는 상대적 풍요, 소비재, 개인적 만족 등에 가치를 두었다. 이러한 가치관과 도덕관의 변화는 미국에서는 섹스 잡지 산업의 급성장으로 표출되었는데 1920년에 창간한 대표적인 섹스 잡지 True Story는 독자수가 1923년에는 30만, 24년에는 85만, 26년에는 200만에 달했다.
프랑스에서도 가족과 여성의 성적 욕구에 대한 새로운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루와세 보댕(Louise Bodin)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은 성적 즐거움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을 찾는 미혼여성들은 전후 남성들이 줄어들어버린 상황에서 더 이상 현실적이지도 온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했으며 마르탱 드 토리나(Martin de Torina)는 전후 인구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혼모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빅토르 마가리트(Victor Margueritte)의 소설 라 가르손느(La garconne) un garcon은 불어로 소년이란 뜻으로 남성형이다. 빅토르는 여기에 ne를 붙여 여성형인 une garconne을 만들었는데 이는 "선머슴", "남자 같이 거친 여자"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Jame F. McMillan은 House or Harlot: the place of women in French society 1870-1940에서 1920년대 유행했던 짧은 머리와 납작한 가슴을 "la garconne look" 이라고 표현했다.
는 프랑스 사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약혼남과 결혼한 뒤에 여전히 가정주부로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이 난교(multiple love affairs)와 동성애, 변태 성행위와 마약에 빠져 스스로를 타락시킨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나흘 동안 20,000부가 팔렸고 영어를 포함한 12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라 가르손느의 선풍적인 인기와는 달리 루와세 보댕이 성 도덕에 대한 feminism 주류의 의견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의견은 대체로 미혼모와 결혼 제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르탱 드 토리나와 마찬가지로 미혼모의 권리를 대변하던 레옹 프라피에(Leon Frapie)는 결혼 제도에 대한 양보 없는 투쟁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회 변화에 대한 반대와 저항은 대단한 것이었다. 짧은 머리, 짧은 치마, 납작한 가슴으로 대변되는 전후 여성 의복의 변화는 이러한 옷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이 가진 성적 함의와 함께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여성 의복의 혁명은 정숙한 숙녀의 이미지(prudery)를 파괴하는 데는 명백하게 실패한다. 우익 신문 라 프랑세즈 (La Franeiase)의 소유주 장 미슴(Jane Misme)은 양친이 없는 가정에서 아동을 양육해 사회로 내보내는 것은 사회와 아동에 대한 범죄라고 주장했으며 이 신문의 다른 후원자 역시 성적 자유주의에 반대하였다.
  • 가격3,000
  • 페이지수53페이지
  • 등록일2008.01.13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703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