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의 역사적 의미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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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양귀비의 생애

2. 당대의 시대적 배경

3.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4. 안록산의 난과 양귀비의 죽음

5. 사서를 통해 본 양귀비의 영욕의 세월

6. 세계사 속의 양귀비

7. 참고자료

본문내용

결탁과 엽관운동-돈-착취 등으로 악순환이 진행되는 관계이다. 이러한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양귀비는 여성으로서 대단히 사치스러운 유형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한 실례는 다음과 같다.
① 화려한 온천탕을 즐긴 것
② 그의 사치한 의복을 공급하기 위해 비단 짜는 여직공이 700명이나 전속으로 배치된 것
③ 조각장식을 위한 기술자도 수백 명을 두고 있었던 것
④ 그녀가 어렸을 때 즐겨 먹던 남방과일인 여지를 운반해 먹은 것
백거이에 의하면 여지는 나무에서 딴지 3일이 지나면 색깔이나 향기가 변하기 때문에 이를 급히 수송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총역을 설치했다고 한다. 또 엄경망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이를 탁송했던 최초의 역공에 관한 지점을 2가지 설로 말했다. ①영남설, ②부주설이 그것이다. ①은 당나라 사람이 말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역사는 한대부터 있어온 구설이라는 것이고, ②는 북송 이후부터는 한대를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귀비의 인척비리는 위로는 현종에게 좋게 이야기를 해 달라는 부탁에서부터 아래로는 엽관운동에 이르기까지 민간의 작은 일이 많았으리라 본다. 실제로 「자치통감」에는 호부상서 배돈복이 현종에게 말을 잘 해달라는 사례의 뇌물로서 태진의 동생에게 황금 500을 뇌물로 바친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양씨 일가의 이른바 오가'의 대문 앞에 찾아들기를 장터처럼 인산인해를 이루어 번잡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요컨대 귀비의 생활은 사치스러움이 따르고 있으나 이것은 궁중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고려해 볼 때 다소 경감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 밖의 문제는 그 개인으로 버며 오히려 여성으로서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두루 갖춘 조건 때문에 현종에게는 마냥 보아서 즐거움을 주고 함께 더불어 있음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를 잘 가꾸어 가야하는 황제의 측근에 있으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데서 궁중정치의 부패온상으로 매도되어 왔다. 그러나 그녀의 예술과 가족을 돌봐준 아름다운 심덕에 관한 한 여성의 아름다움이 평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을 돌보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진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다음해인 756년 6월 13일 새벽에 현종과 귀비.황족.황자 등 일행은 그들을 호종하는 약간의 병사를 이끌고 흥경궁을 탈출하여 사천으로 도망쳤다. 이들은 다음날 서북방으로 위수를 따라 가다가 장안성에서 약 60km가량 떨어진 마외역에 당도하자 피로에 지친 나머지 병사들은 양국충을 죽이고 이어 한국부인.진국부인을 죽였다. 양국충을 죽이게 된 직접동기는 신하 가운데 죽여야 한다고 보고한 자도 있었겠으나 그가 티벳사절로부터 먹을 식량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있었던 병사들이 모반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화살을 당겨 죽였다. 이때 고력사가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귀비를 애살시켰다고 한다. 이 때 양귀비의 나이가 38세 이었고 현종은 72세였다.
비취 깃발 흔들흔들 가다가 서다가,
서쪽으로 성문을 나서기 백리 남짓,
육군(六軍)이 꿈쩍 않아 어쩌지도 못하고,
어여쁜 여인은 말 앞에서 죽어갔네!
꽃 비녀 떨어져도 집는 사람 하나 없고,
비취 깃털, 공작 비녀, 옥비녀도 버려졌네.
황제는 얼굴 가린채 구해주지 못하고,
돌아보는 얼굴엔 피눈물만 흘렀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양귀비의 죽음은 그녀가 죽임을 당하는 입장에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이 강제로 집행되었다.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당현종은 태상황(太上皇)이 되었고,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라 칭하였다.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하고 얼마나 그리워하였는지 모른다.
저녁이면 날아드는 반딧불에 그리움은 더해지고,
외로운 등잔불을 돋우느라 잠 못이루네.
서서히 울리는 종소리에 밤은 더욱 길어져,
반짝이는 은하수에 동이 트려 하는구나.
싸늘한 원앙 기와 서리꽃 피어나니,
차가운 비취 이불 뉘와 함께 같이할까?
아득히 사별하여 해가 다시 지나가도,
영혼은 꿈속으로 찾아오지 아니하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그리고는 당대의 대시인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비극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장구한 천지도 끊일 날이 있겠지만, 이들의 한은 끊일 날이 없으리라."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 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양귀비가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 간을 활동하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수화'(羞花: 꽃이 부끄러워한다)라는 말을 쓴다.
하루는(아직 현종을 만나기 이전)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다.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하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含羞草)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그 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羞花)"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6. 세계사 속의 양귀비
일개의 女人이 大國의 성쇄를 좌지우지하는 일은 세계역사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양귀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세계 3대 미녀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국가에 있어서도 그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여전히 그러한 양상은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양상에 대한 명칭을 우습지만 양귀비 Syndrome'이라고 붙여본다.
7. 참고자료
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중국사, 조관희 엮음, 청아출판
재미있는 중국사 여행, 강영수, 예문당
세계사를 바꾼 여성들, 데보라 G 펠더, 에디터
중국의 역사, 볼프람에베하르트, 문 출판사
소설 양귀비, 井上靖 , 을지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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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17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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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47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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