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_좌우합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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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 어 가 며

Ⅱ. 해방 후 한반도의 정세
(1) 건국동맹
(2) 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
(3) 남북합작위원회(南北合作委員會, 혹은 좌우(左右)합작위원회. 이하 합작위)의 활동

Ⅲ. 남북합작운동의 실패 요인과 그 이후 우리나라 정치상황
(1) 국외적 요인
(2) 국내적 요인
(3) 이후 상황

Ⅳ. 맺 으 며

Ⅴ. 주요 인물들에 대한 분석
(1) 여운형
(2) 김규식
(3) 안재홍
(4) 조봉암

본문내용

임한 목적도 미 군정의 행정권을 인수 받고, 미, 소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려는 데 있었다. 안재홍은 입법의원을 북한의 인민위원회와 마주 대할 구심체로 발전시켜, 이를 중심으로 인민위원회와 합작하여 남북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이와 같은 좌우합작노선은 김규식과 일치하며, 이승만, 한국민주당 계열,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과 크게 달랐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이른바 정읍 발언으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뒤, 이승만, 한국민주당 세력은 좌우합작세력을 드러내놓고 배격했고, 미, 소공동위원회에는 들까 말까 저울질하며 단정 노선을 걸었다.
중경 임시정부 세력은 일관되게 임시정부 법통론에 기대어 입법의원에 참여하는 좌우합작운동을 배타시했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애당초 부정해 미, 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는 일마저 완강하게 거부했다. 미, 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미, 소 대립의 구도에 편승하는 이승만한국민주당 계열의 현실주의, 법통에 매여 한국문제의 국제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는 중경 임시정부 계열의 민족자결론 이 두 계열의 우익과 구별하여 자신과 중도우파를 순정우익(純正右翼)으로 이름 짓는다. 크게 기대했던 제2차 미, 소공동위원회마저 1947년 10월 결렬되자, 그는 미, 소 협조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불가피하게 수용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납북될 때까지 안재홍은 남한에서 순정우익(진보민족주의자)을 정치세력화해 민주역량을 강화하고, 이로써 이승만 정부의 독재화에 저항하는 한편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기틀을 다지고자 했다.
(4) 조봉암
조봉암은 일제 강점시대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익전선에서도 비교적 코민테른 쪽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920년대 후반기 이후 민족해방운동선상에 나타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 즉 민족 유일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물론 이 시기의 코민테른 노선이 민족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조봉암 자신이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한 일차적 목적이 조국독립의 달성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 남쪽에서 활동한 일제 강점시대 공산주의 운동자 중 드물게 1920년대 후반기 좌우익 통일전선으로서의 민족 유일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사람이었다. 1930년대 후반기 이후의 통일 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김성숙, 장건상 등과 함께 그들의 해방 후 정치 활동 노선 결정과 연관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좀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해방 직후 그는 조선공산당에서 보다 건국준비위원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더 두드러지게 활동했다. 박헌영에게 보낸 공개서 안에서 그는 통일전선으로서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공산당원이 너무 많이 침투해 있어서 비 당원의 능동적 활동이 제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산당원이 통일 전선체 속에 많이 침투해서 그 헤게모니로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선과, 공산당원이 너무 많지 않고 주도하지 않는 명실공한 좌우익 통일 전선체를 만들어 그것을 중심으로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노선의 차이가 해방후의 좌익운동 내부에 있었고, 그것이 당시의 좌익세력을 강경좌익과 온건좌익으로 나누어지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38도선이 확정되고 미, 소 양군이 분할점령하고 있는 조건 아래서 남복에 각각 분단국가를 성립시키려 하는 경우, 극우세력은 38선 이남에 자본주의곡가를 쉽게 세울 수 있었고 극좌세력은 그 이북에 사회주의국가를 쉽게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민족분단을 막고 남북을 통한 통일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 할 경우 극우세력이나 극좌세력의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쥐는 통일 국가를 건설하기란 연실적으로 지난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극우세력이 주도권을 쥐는 통일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 할 경우 소련과 극좌세력이 용납하기 어려웠고, 반대로 극좌세력이 주도권을 가지는 통일국가를 건설 하려 할 경우 미국과 극우세력이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때문에 통일 국가를 건설 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여운형,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가 성립되었고, 이극로, 조봉암 중심의 온건 좌익 조직으로서의 민주주의 독립전선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조직이 함께 ‘미 소 공 위 대책 각 정당 사회 단체 협의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남북에 두 분단정부가 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통일 민족국가가 수립운동에 나섰던 정치세력들은 김구, 김규식 등과 같이 남북 어느 쪽 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고 이극로 등과 같이 북쪽 정부에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 공산당과 결별한 조봉암은 북쪽 정부에 참여할 수는 없었고 김구,김규식 등과 노선을 같이 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김철수, 임원근 등과 같이 정치생활을 청산할 수도 없었다. 그는 결국 이승만 중심의 남한단독정부에 참여하는 길을 택했다.
일제 강점 시대 민족해방운동의 좌익전선에서 활동한 조봉암의 남한단독 정부 참여는 친일 세력을 동반함으로서 역사적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이 취약했던 이승만정권의 명분을 세워주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진보당의 창당으로 특히 6 25 전쟁 후 분산상태에 있었던 '해방공간' 에서의 중도차와 온건좌파를 결집하여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형성되게 했고, 6 25 전쟁 과정을 통해 이적론으로 간주된 평화통일론을 다시 공론화 하여 뿌리 내리게 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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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심지연. “항일 독립투쟁과 좌우합작.” 한울. 2000.
안정애. “좌우합작운동의 전개과정.” 최장집 편. ‘한국현대사’ Ⅰ. 부산: 열음사. 1985.
김희곤.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지식산업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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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인물사. 이현희. 새문사. 1994.
진덕규. “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서울: 한길사. 1989. (1~2쪽)
홍인숙, 「건국준비위원회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논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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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19
  • 저작시기2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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