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외교와 개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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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대원군의 삶과 정치

2. 대원군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방법

3. 대원군 집정기의 정치세력

4. 대원군 정권의 대외정책 사례
(1) 병인양요
(2) 미 해군 군함 USS 셰넌도어호의 방한
(3) 오페르트 도굴사건
(4) 일본에 대한 정책
(5) 신미양요

5. 대원군의 개혁정치
(1) 서원 철폐
(2) 경복궁 중건
(3) 삼정의 폐단 개혁
(4) 쇄국정책
(5) 인사개혁
(6) 그 외의 개혁

6. 대원군의 개혁에 대한 평가

7. 나오며

8. 참고자료

본문내용

쇄국정책을 펴 나갔다. 대원군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에서 공개적 반발은 없었으며 이런 속에서 대원군은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국끼리 통교하는 고래古來의 국제관계를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서원철폐로 양반들의 지지를 잃었고,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 속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경복궁 중건 사업 때문에 그의 유일한 지지기반이었던 민중들의 지지마저 잃게 되었다.
이리하여 흥선대원군은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양반 유생들의 하야 촉구와 민심의 이반 속에 아들 고종의 친정 선언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10년 세월을 뒤로하고, 운현궁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조선 왕조의 마지막 파수꾼이 되고자 했던 대원군이 물러나자 조선의 운명은 명성 황후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정권에 넘어갔다. 민씨정권은 끊임없이 외세를 끌어들였고, 민비가 살해당한 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된다. 한편, 대원군은 그 후에 여러 차례 복권을 꿈꾸었으나(82년 임오군란, 87년 위안스카이와 결탁, 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에 의해 옹립, 청과 결탁하다 쫓겨남, 95년 일본 책략에 의해 정권획득, 민비살해사건이 나자 은퇴) 매번 실패하고 1898년 사망하였다.
6. 대원군의 개혁에 대한 평가
대원군은 10년이라는 짧은 집권기간 동안 많은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 정책들은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것이 없었고, 이전의 집권자들도 항상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제왕도 해결의 대안을 내놓거나 단호하게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기에 대원군의 결단력 있는 추진은 개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을 통한 봉건적 정치 구조를 혁신하려는 모습에서 그를 근대 지향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대원군이 그처럼 근대 지향적인 인물이었다면 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해야 했을까? 그 첫 번째 답은 지나친 쇄국으로 인해 조선 전체가 근대적인 시각과 능력을 갖출 시간적인 여유를 박탈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이전에도 많이 거론되어 왔던 이유이다. 두 번째로 앞서 언급했던 그의 결단력 있는 개혁의 이면에서 근대적인 요소보다는 오히려 전근대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학자들이 대원군의 개혁 정치중 경제적인 실책(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무명잡세 징수, 당백전 발행 등)에 대한 문제점만을 제기했지, 그의 세도정치 타파와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서원 철폐, 조세 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 왔다. 그러나 이것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이상이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대원군은 서원 철폐나 조세 개혁을 통해 양반들의 특권을 많이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인 평등한 개혁이라기 보다는 농민들의 불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계책이 숨어 있었다.
대원군의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을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중인, 서리, 서얼들을 정치에 참여시킨 사실이다. 물론 이들은 대원군의 사조직 속에 널리 분포하여 통치 도구로 활용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이들의 정치적 지위를 보장하는 어떤 '제도 개혁'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 중인들의 정치적 지위를 요구하는 운동이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이르고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이것의 한계가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다음은 대원군의 조세 제도 개혁에 대한 것이다. 물론 그의 개혁으로 인해 많은 민중들이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의 개혁목적은 민생 안정과 사회 전반의 근대화보다는 다른 목적 아래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원군이 어려운 국가 재정과 민중생활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을 중건한다고 선언한 것은 사회 전체를 위한 개혁이 아니라 왕실을 위한 것이었으며, 미래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과거로의 회귀(回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7. 나오며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원군의 정치개혁은 內外의 여러 난제들을 맞이하여 나타난 것으로서 어느 정도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이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못되었다. 농민층의 요구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못되었다. 그의 정책은 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쇠미해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농민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支配層에게 若干의 희생을 강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대경씨의 의견에 의하면 안동김씨 외척 대신에 종친선파를 권력기반으로 하는 또 다른 세도정권'인 것이다.
또한 앞서 살펴보았던 대원군의 대외정책 역시 눈앞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근시안적인 정책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민중들에게 이후 수 십년 동안을 고통을 안겨주고 말았다. 대원군이 펴낸 정책은 모두 한반향, 즉 왕실 권위 회복과 봉건 반동이라는 것을 여태까지 봐왔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우던 흥선대원군의 모습이다. 중학교 국사 하권에 보면 이러한 때에 왕권을 잡게 된 흥선대원군은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실시하여 나갔다. 즉, 그는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때,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차례로 강화도에 침입해 왔으나, 흥선대원군은 강력하게 그들을 격퇴시켰다. 이라는 식으로 대원군을 미화시키고 있다. 물론 대원군이 펴낸 정책들이 민중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나 동기주의에서 보면 과연 그가 민중을 생각해서 그러한 정책들을 펴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지배자 중심에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그 시대의 민중의 삶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흥선대원군을 한사람의 권력을 쟁취하고자 일생을 바친 사람으로써 바라다보았다. 역사의 심판은 냉혹하다. 그 위정자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8. 참고자료
정보일, 대원군의 대서원 정책에 관한 연구, 건국대학교 석사학위 청구논문
이선근, 대한국사 6, 신태양사
구로역사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2, 거름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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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23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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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48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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