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팽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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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Ⅲ. 제정의 성립과 로마의 평화
1. 제정의 구조 2. 로마의 평화

Ⅳ. 아우구스투스 치하의 사회
1. 계층구조
2. 제국의 숭배의식과 제국의 통일
3. 거동과 도덕
4. 로마와 이탈리아의 노예제

Ⅴ. 아우구스투스 치하의 변경과 속주

Ⅵ. 결론

본문내용

부정이 아직 발견되고 있었다. 신약성서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예를 들어 유태인들이 징세원을 죄인과 동일시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중앙정부의 기능이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는 한 일반 속주의 운명은 그전보다 좋아졌으며, 어떤 지역에 있어서는 훨씬 좋아졌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의 제국이 근대 국가였다면 막대한 군사편제를 어떻게든 지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경제에 의존한 거의 공업화가 되지 않았던 고대 국가로서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길게 뻗어 있는 로마의 변방에 아우구스투스가 배치한 군대는 놀랄정도로 소규모의 것으로서 지원군을 가진 22 내지 25 군단 이들 군단의 평균 인원은 25만에서 30만으로 추산된다.
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좀 더 보수적인 외교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기원전 53년에 크랏수스(Crassus)가 파르티아(Parthia)에게 잃어 버린 3개 군단기를 돌려받는 데 군사적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협상을 통하여 이를 기도했으며, 또한 성공했다. 그는 그의 성공을 공포 선전하였따. 그는 주조화폐들 중의 하나에 ‘군기수령(Signis receptis)이란 말을 넣도록 했다. 주조화폐는 취향적이긴 했지만 지속적인 공식선전의 수단이 되었다.
얼마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라인-다뉴브 변경을 따라 로마의 지배를 확장시키는데 정력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오늘날의 스위스로부터 트라키아에 이르기까지 로마군은 다뉴브 남부의 모든 땅을 평정하였다. 로마군의 원정은 라인 강을 넘어 동으로 이동해 갔으며, 심지어 엘베 강을 넘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숲의 재난은 3개 군단의 전멸을 가져오기도 했다. 거기에서 로마 사령관 바루스(Varus)는 게르만 부족 지도자 아르미니우스에게 패했는데, 아르미니우스는 한때 로마군에 복무한 적이 있었으며, 기사 신분의 지위가 주어지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이 비참한 패퇴 후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국경을 라인 강으로 정하였다.
全이베리아 반도가 기원전 19년까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대부분의 북아프리가 해안지역이 로마령이 되었으며, 단지 1개 군단을 가지고 이 지역을 제국에 붙잡아 둘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은 이집트의 2개 군단으로부터 뒷받침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말기에 이를 무렵, 양자로 프린켑스의 손자가 된 게르마니쿠tm(Germanicus)는 또다시 라인 동부로 위험을 무릅쓰고 진격했다. 아우구스투스 사망 후 1년이 지나 게르마니쿠스는 바루스가 패배했던 같은 전쟁터에서 역시 재난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사망 후에도 평화는 제국의 모든 변경에 유지되었다.
Ⅵ. 결 론
이상에서 알아 본 바와 같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확립된 로마에 의한 평화, 즉 팍스 로마나는 오현제의 시대를 거쳐 영화 ‘글래디에이터’에도 등장하는 폭군 코모두스(Commodus)가 제위를 계승함으로써 약 1세기에 걸친 살육과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로 들어가기 전까지 약 200년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그러면 그토록 찬란했던 로마제국은 왜 멸망하였을까?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적절하지 못하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인 에드워드 기번이 지적한 것처럼 ‘왜 멸망했느냐고 묻기보다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로마인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로마인이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지금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일률적인 해답을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흔히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카르타고와 벌인 사투에서 승리한 뒤 기나긴 혼미에 시달린 공화정 시대, 카이사르가 그린 청사진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으로 이행한 후 팍스 로마나를 확립한 로마제국의 천년에 걸친 끊임없는 위기와 극복의 역사에서 역사의 본보기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Peter Rietbergen, 유럽 문화사, 知와 사랑, 2006
민석홍, 西洋史槪論, 삼영사, 2002
Henry C. Boren, 서양 고대의 역사와 문화, 탐구당, 2004
허승일, 로마사입문-공화정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이야기1-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길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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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8.02.12
  • 저작시기2008.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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