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강화책을 통해 본 대원군의 정세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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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 론
일본의 경우
대원군의 국방개혁
대원군의 군비강화정책 평가
대원군시대의 再도래
<참고문헌>

본문내용

부는 포군의 설치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그 포의 화력이 우수했느냐 하는 것도 의문시된다.
셋째, 군비증강을 위한 방법의 선택에 있어서도 청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사학자 菊池謙讓은 천주교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대원군이 돌연 태도를 바꿔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게 된 주요 원인을 청국과 러시아의 정황을 청국에서 돌아온 동지사(冬至使)에게서 전해 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동지사의 보고는 서양인들에게 패배한 청국의 형세가 완전히 호전되었으며, 러시아세력의 위협도 급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원군은 프랑스와의 좋은 관계가 청국을 노하게 할 것 앞의 책, 290
이라는 지극히 사대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부정확한 현실인식과 함께 사대주의적 태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군사기술의 습득에 있어서도 그 사대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일본은 미 군함의 출현에 당황하여 해방(海防)의 대책을 강구하게 되고, 선진 해양기술을 가진 네덜란드의 도움을 받게 된다. 반면 대원군은 아편전쟁의 패배와 영불 연합군의 북경점령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의 기술만이 문명의 그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심지어 간간히 무기를 구입하기도 했던 일본이 개국하자 강경한 배일정책을 취하게 된다. 앞의 책, 291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이 습득 가능한 기술은 청국의 기술을 뛰어넘을 수 없었으며 당시 청국의 군사기술, 특히 해군력의 기술적, 전술적 능력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는 1894년의 청일전쟁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에 대한 논의는 강성학, “용과 사무라이의 결투: 중(청)일 전쟁(1894-5)의 군사전략적 평가”, (국제정치논총 45:4, 2005) 참조
심지어 그러한 기술의 이전마저 양무서적의 형태를 통해서 가능했다. 군사력 습득에 있어서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장래 국가위상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를 상기해보면 위정자가 어떤 인식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구상하는지에 그 나라의 국운이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원군의 편식적 기술 수용은 군사기술에만 악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서양의 과학기술 수용에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던 대원군의 일면 무사안일한 배외정책은 이후 국내기술과 서양기술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였고 국내 학자들의 탐구심까지 위축시켰다. 박성래, 앞의 글, 15
이때부터 뒤처진 과학기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조심스럽게 제기해본다.
대원군시대의 再도래
대원군이 배외정책을 펼친 이유를 그가 당시에 처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된 것이다. 천주교도와 프랑스군, 미국군과의 내통사실과 오페르트 도굴사건 등은 대원군을 분노하게 했고, 그런 역사적 맥락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외부의 영향을 막고 자국의 상태에 대한 정보의 누설을 막음으로써 자국내의 기존 사회와 문화를 보호하려는 일종의 봉건적 국가안보책인 쇄국정책을 선택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살펴본 대원군의 군비 증강책은 그가 현실을 얼마나 적절치 못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이라는 비전이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쉽게 생각해보아도 안보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①국제정세를 분석, ②자국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협요소를 식별, ③위협요소를 배제하기 위한 외교적, 군사적 수단의 강구, ④국가안보를 위한 군사적 수단의 보유목표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박영준, “일본의 신방위계획대강과 중기방위력정비계획”, (군사논단 42, 2005), 168
대원군은 서세동점의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서양 세력이 자신이 생각했던 자국의 가치를 위협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지만 선진국의 군사기술 수준에 대한 충분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위협요소에 대처하기 위한 외교적, 군사적 수단을 오직 청국에 의존함으로써 국가안보에 필요한 최소한의 군사적 수단마저 보유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현재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으며 군사력에 있어서도 최첨단의 원거리 무기들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원거리 무기라면 자국 지역을 벗어나 사용할 수 있는 무기와 적의 공격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정찰 자산까지를 통칭한다. 이런 무기로 일본은 정찰위성, 조기경보기, 공중급유기, 이지스 전함, 잠수함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항공모함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일본에 비해 다섯 배에 가까운 육군 병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이 신식 전함을 보유하기 위해 노력할 때 단지 구식 화포의 증강만을 추구했던 대원군의 노력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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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용과 사무라이의 결투: 중(청)일 전쟁(1894-5)의 군사전략적 평가”, (국제정치논총 45: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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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래, 『대원군시대의 과학기술』, (한국과학사학회지 2:1,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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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신방위계획대강과 중기방위력정비계획”, (군사논단 42, 2005)
박찬식, “신현의 국방론”, (역사학보 117,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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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오카 요시타케, 『근대일본정치사』, (서울: 소화, 1996)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한국군제사』 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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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2.29
  • 저작시기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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