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과 고려의 자선 구제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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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들어가며

Ⅱ 고대 삼국시대의 자선구제
1. 자선구제의 배경
1) 시대적∙ 사회적 배경
2) 경제적 배경
3) 사상적 배경
4) 구제원인과 제도
2. 삼국시대의 구제사업
1) 자구책
2) 삼국시대의 민생구제사업
3) 전달체계
4) 민간구제
3. 삼국시대 자선구제의 특징

Ⅲ 고려시대의 자선구제
1. 자선구제의 배경
1) 정치∙ 사회적 배경
2) 사상적 배경
3) 경제적 배경(봉건적 경제구조)
2. 고려시대의 구휼제도 및 구제사업
1) 구제정책 및 제도
2) 구제사업의 내용
3. 고려시대의 빈곤정책
1) 제도화의 배경
2) 빈곤정책의 변천과정
3) 빈곤정책의 주체
4) 급여대상과 방법
5) 급여종류와 규모 및 재원조달
4. 고려시대 자선구제의 특징

본문내용

생각되지만 [고려사]에 노비에게 행한 구빈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국가 정책적으로 행하던 구빈제도의 혜택이 이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던 것으로 일단 간주할 수밖에 없다.
5) 급여종류와 규모 및 재원조달
① 급여종류
일반적인 사회적 급여의 종류는 급여대상자들에게 전달되는 대책이 어떤 형태로서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로서 종래에는 현품이나 현금과 서비스 사이의 선택이었으나 점차 그 형태도 다양해져서 기회, 권력, 보증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있어서 이렇게 세분화된 형태에 따라 급여 종류를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물질적 급여와 빗물질적급여 둘로 나누어서 알아보고자 한다.
가. 물질적 급여
물질적 급여의 대표적인 것은 식량에 대한 진급이었다.'발창과 개창'이 이런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창을 통한 진휼 종류는 주로 쌀, 조, 소금 이였다. 쌀, 조, 소금, 의복, 간장, 된장 외에 광종 19년(968)에는 떡과 콩, 땔감을 주기도 하였으나, 베도 중요한 진휼물종의 하나였다. 고려시대에 있어서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상품유통이 활발해졌고 교환수단이 필요했는데 비록 중국의 화폐가 유통되고 성종 15년( 996)에 최초로 철전이 주조되기도 했으나 쌀, 삼베, 모시가 주된 유통수단이었다.
이상에서 볼 때 의식주 생활 중에서 의식에 대한 진급은 여러 번 시행되었으나 수재로 인하여 80여호 또는 100여호가 침수되었는데도 주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다만 문종 5년(1051)에 수재를 당한 120여호에 대하여 재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자연재해와는 무관하지만 현종조에 빈번한 거란과의 전란으로 인하여 농사를 그르쳤고 이때에 조정에서는 전화지역에 식량과 종자와 함께 농구와 관우를 주어 농사를 돕기도 하였다. 또한 가난하여 장례를 치루지 못하는 자에게는 장례비를 지급하였다.
나. 비물질적 급여
비 물질급여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서대비원, 제위보, 혜민국, 제위도감, 구제도감 등의 국립구료기관에서 행한 환자의 치료 및 무의무탁자에 대한 서비스를 들 수 있다. 아울러 견면과 같은 조세감면제도 및 비상시 일시적으로 행한 파역, 사면 등도 들 수 있다. 그리고 불교가 국교였던 당시에 신앙과 심리적, 육체적인 병 치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의승과 의관에 의한 초보적인 상담서비스는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② 급여규모
빈곤정책의 시행에 있어서 수적으로 얼마만큼의 인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양을 제공했는가를 알아봄으로써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가. 급여자 수
이 당시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 알아보려면 당시 인구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이 있어야 하겠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구빈기록에 나타난 인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인원이 나타나 있는 기록을 보면 태조 원년 (918)의 1,000여명으로 부터 시작하여 현종 즉위년 (1010)에 남녀노인과 독질자 635명, 문종 5년 (1051)에 80세 이상의 승속남녀 1,343명, 독폐질 승속남녀 653명, 효자. 순손. 절부 14명, 동왕 13년(1059)에 국. 서로 및 독질자 등 1,280명이 보이고, 가장 대규모적인 기록으로는 동 왕 6년 (1052) 경성에서 30,000여 명의 기민을 진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빈약하고 소략한 기록들만으로는 입체적으로 정확한 규모를 밝히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나. 급여량
구체적인 급여량에 대해서는 [고려사]의 여러 곳에서 보이지만 단일 시행으로 가장 많은 양을 진휼했던 것은 성종 9년 (990)의 일로 평양부를 비롯한 11주 12현 11역에 도곡 9,375석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상지역이 너무 광대하였기 때문에 분배량이 적었고 이 외에도 개인에 대한 시혜기록으로 왕이 출어하는데 쌍둥이를 안고 있는 부인을 보고 베 20필을 주었고, 거지를 보고는 한 사람에게 베 1필과 솜2량씩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것은 왕 개인의 은혜적인 하사이므로 제도로서의 급여량을 파악하는 데는 별 의미가 없다.
③ 재원조달
기본적으로 재원은 조세를 통하여 조달되었다. 특수한 경우 민간재원의 수합에 의하여 충당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예방책에서 방재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재원은 종종 고갈되기도 하여서 제반 기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폐지되기도 하였는데 그 대비책으로써 일정한 자금을 예비하고 그 이식을 재원으로 충당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후기에 와서는 국가재정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하여 납속보관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원으로부터 구빈을 위한 외자도입을 하였는데 대체로 원으로부터 대량의 미곡을 하사 또는 차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려가 외부의 원조에 의존케 된 요인은 각종 재해와 함께 원이 요구한 일본정벌에 대한 전비부담 등에 의해서 국고의 허갈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에 국내의 기근 등 재난을 돌볼 재정적 여력이 없었던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4. 고려시대 자선구제의 특징
고려시대 자선구제의 특징으로
첫째,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승려와 불도들에 의한 구빈.시료 및 고아보호와 양로사업 등이 성행했다.
둘째, 구빈과 관련된 여러 공적 기관이 설치되었고 빈곤정책을 구체적으로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구제기관을 상설구제기관과 임시구제기관으로 나누어 상시적 구제는 물론, 위기상황에 대비하였다. 진휼품목으로는 식량이 주였으며 그 밖에 소금. 장.옷.포목.금전 등이 주어졌다.
셋째, 공적 구제의 재원은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조달했지만 특수한 경우 민간재원에 의해 구제를 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종종 재원이 고갈되어 제반기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그 대비책으로 일정한 자금을 예비하고 그 이식을 재원으로 충당하는 제위보를 운영하기도 했다.
넷째, 동서대비원과 같은 관립 의료. 수용시설이나 해아도감과 같은 아동시설이 설립되어 한국 사회복지 발달 사상 처음으로 시설보호가 도입되었다.
마지막으로 구빈기관의 소재지들이 의창, 상평창 등 창곡기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도에 위치함으로써 전달체계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며, 수도에 거주하는 일부 빈민들에 한해 그 혜택이 한정적으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키워드

빈곤,   진대법,   구휼,   흑창,   상평창,   의창,   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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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08
  • 저작시기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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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5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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