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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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나의 생각

2.구로사와 아키라의 삶과 배경

3.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론

4.작품론, 모색 및 가능성의 시기

5. 작품론, 절정기의 작품 1 <라쇼몽>

6. 작품론, 절정기의 작품 2 <산다>

7. 작품론, 절정기의 작품 3 <칠인의 사무라이>

8. 작품론, 완숙기 <생존의 기록>에서 <붉은 수염>

9.작품론, 칼라시대 <도데스카뎅>에서 <마다다요>

10.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미학

본문내용

작품보다 힘이 있고 움직임이 많다. 구로사와의 카메라는 빠르고 힘차게 움직이며, 매끄럽고 세련되게 움직인다. 그는 인물들의 성격을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극적인 상황역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강화시킨다. 그의 카메라를 다루는 능력은 적절한 순간까지 움직이지 않고 절제하여 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는데서 나오는 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서 사운드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는 일관성 있게 음악이 사용된다. 서구적인 음악에다 일본적인 리듬을 적절히 배합하고, 인물의 성격이나 집단의 성격에 따라 각각 별개의 테마음악을 부여하고 있다.
구로사와가 사용한 테크닉의 탁월함은 여러 부문에서 나타난다. 당시엔 별로 사용되지 않았던 망원렌즈의 대담하고 효과적인 사용과 극대 클로즈업, 슬로모션과 함축적이고, 빠른 편집의 효과, 원형을 이용한 화면 구성등이 바로 그것이다.
8. 작품론, 완숙기 <생존의 기록>에서 <붉은 수염>까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가 <7인의 사무라이> 이후 초기의 도덕적 관심을 버리고, 주로 슈퍼맨 사무라이에만 의존함으로써 뚜렷한 퇴보를 겪어 왔다는 평가가 있다. 그건 어쩌면 그간의 얻어진 명성이 너무나 껐기 때문인 것 같다. 절정기의 작품에 비해 여러 가지로 미흡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퇴보라 할 만큼 그 이후의 작품들이 처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초기 작품에 비하면 이후 10년간 만들어진 아홉편의 작품은 구로사와의 완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당시의 모든 작품들은 예전처럼 대중적인 성공과 예술적인 성공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가로서의 느긋함이 엿보이며, 가벼운 소재를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다루기도 한다. 그에게는 가장 무난한 작품을 만든 활동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때 만든 작품으로 주의 깊게 볼 만한 것들은 <거미집의 성>과 사무라이 오락영화의 걸작인<요진보> <쓰바키산주로>그리고 <천국과 지옥>등이 있다.
9.작품론, 칼라시대 <도데스카뎅>에서 <마다다요>까지
항상 완벽한 형식 미학을 지향해 오던 구로사와는 마침내 색이라는 또 하나의 미학 요소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는 <도데스카뎅>과 <데루스 우잘라>를 통해 컬러 영화를 실험한 후 <카케무샤>와 <난>, <꿈>을 통해 색채 영화의 미학을 완성시켰다. 이제 그의영화에서 색채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는 색채를 도입한 이후에 많은 변화를 시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더 이상 슈퍼맨 사무라이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초기 작품부터 흑백 영화를 마무리 할 때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서 주연 및 조연으로 등장해 자신을 대변하던 미후네 도시로와 시무라 다카시라는 배우와 작별을 고했다. 그는 일본 내에서 제작자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외국 자본가에게로 눈을 돌렸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작품은 외국 자본으로 만들어지면서부터 오히려 그 미학이 보다 일본적으로 변화해 갔다. 흑백 시대 때만 해도 부분적인 양식화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하고 있었으나 컬러 시대로 들어서면서 갈수록 형식적인 엄격함과 단순성을 따르기 시작했다. 특히 그동안 드러나지 않고 은근히 감춰진 채 간혼 내비치던 구로사와의 일본적인 보수성과 우익성 그리고 자만심이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꿈>과 <8월의 광시곡>에서 그러한 면이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구로사와의 영화적인 삶과 변신 과정을 보노라면 마치 그가 일본의 정신과 역사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0.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미학
최선의 경지에 이른 미학적인 완성도
그는 기존의 문법을 깨고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기보다는 이미 창조되고 사용되었던 것을 한 차원 더 높게 발전시키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미학적인 테크닉은 자신이 영향을 받은 미국영화를 뛰어넘어 최고의 단계에 까지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완벽에 대한 욕망으로 후기에 갈수록 그의 미학이 지나치게 독선적이 되어 답답한 틀 속에 갇혀 버린 점 도 있다.
구로사와는 카메라를 사용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도망이나 추적에서는 트래킹을 사용하고 서스펜스 스릴러적 상황에서는 팬을 사용하는 식으로 움직임을 결정한다. 그의 카메라는 60년대까지는 역동적이지만, 후기작품으로 갈수록 정적으로 변화해 간다. 그가 카메라를 다루는 기본 원칙은 영화 속의 인물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가장 카메라가 정확하고 의미 있게 사용된 작품으로는 <라쇼몽>과 <칠인의 사무라이>이다. 그러나 그는 양식화된 카메라에 집착해 감으로써, 후기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지나친 형식주의로 빠져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느끼게 한다.
편집기교에 있어서도 탁월함을 보여준다. 롱테이크 기법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배합하는 절충주의적인 편집 스타일을 구사하고, 내용의 의미에 따라 편집이 자유자재로 변한다. 그의 편집은 특히 액션장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데, 결투 또는 전투장면의 정교한 몽타주는 다른 형식 요소인 음악. 조명. 카메라 움직임과 어울려 강렬한 이미지를 표출 시킨다. 그는 직접 편집을 함으로써 편집은 시나리오 연출에 이어 또 하나의 중요한 창조 작업임을 인식시킨다.
구로사와 영화미학의 성립 배경과 그 영향
그렇다면 구로사와의 미학과 스타일은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구로사와도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감독은 역시 존 포드다. 구로사와 자신도 그 점을 시인하고 있는데, 그 외에도 자신에게 영향을 준 감독들을 거론하자면, 하워드 호크스, 조지 스티븐스, 프랭크 카프라, 윌리엄 와일러 미조구치 겐지등이 있다.
격동의 1930년대에 시나리오 작가와 조감독으로 출발한 구로사와는 시행착오를 거쳐 온 선배 오즈나 미조구치보다 한 벌 먼저 서구의 영향을 효과적으로 흡수해 국제적인 무대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다음 세대 감독들에게 영향을 준 것도 결국은 뛰어난 테크닉 때문이었다. 루카스, 스필버그, 존 밀리어스 같은 헐리우드 감독들이 그의 테크닉을 상업적으로 대중화 시켰고, 예술지향적인 감독들도 그의 미학적 성과를 인정하고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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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12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4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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