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서평: ‘ 불의 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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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문

2. 스파르타
1) ‘헤라클레스 후손’의 귀환
2) 스파르타의 지리적 위치
3) 리쿠르고스(Lycurgus) 체제

3. 페르시아
1) 세계의 왕
2) 스파르타인의 생활
3) 스파르타의 기본전술 <방진대형(Phalanx)>

4. 페르시아 전쟁
1) 흙과 물을 바쳐라.
2) 이름 없는 자들의 승리
3) 영화 <300>속 허구와 진실

5. <불의 문> 한국의 사례
- 백제의 마지막 희망, 5000결사대

6. 후기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더더욱 아니었다. 즉, 왕 아래 통일된 제식과 제도, 의장 아래 통일된 군대가 아닌 전시에 각 속주에서 파견되어 소집된 군대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대게 오합지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페르시아군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이란인 궁수들이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궁수는 도망치는 적을 향해 쏘는 것 이라는 믿음이 강해 전통적 으로 중장보병이 많았다.
말이 나온 김에 불사의 부대 임모탈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이건 무슨 일본의 닌자도 아니고, 할리우드 영화의 동양 비하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물론 영화 내에서 동방을 대표하는 페르시아는 완전히 악마의 나라로 그려놓은 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임모탈은 페르시아인으로만 구성되었으며, 불사의 부대라고 불리는 페르시아의 최정예 병력이었다. 불사의 부대라고 한 이유는 중간에 사람이 죽거나 하게 되면 바로 사람을 차출해서 항상 1만명의 머릿수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리스의 중장보병의 무장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경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크세르크세스왕의 친인척이기도 한 오론테스장군이었다.
다음으로 스파르타의 무장에 대해 알아보자.
영화에서처럼 상의가 없었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그리스 중장보병의 무장은 투구와 가슴받이 정강이받이를 포함하여 말 그대로 중장보병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경보병보다 못한 무장을 하고 있다. 이 또한 할리우드의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이다.
영화 속의 반전을 주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에피알테스라는 곱추다. 영화 속에서는 스파르타에서 태어났지만 태생 때문에 가족 전체가 스파르타를 떠나게 되었지만 테르모필라이 전투를 통해 스파르타인으로 태어나려는 불쌍한 아이로 나오지만 실상은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말리스 출신의 평범한 한 농민이었을 뿐이었다.
에피알테스의 배신으로 페르시아군은 활로를 얻었고, 정찰병을 통해 적군의 이동을 알아낸 레오니다스왕은 스파르타병력을 포함한 1000여명의 병력을 남긴 채 퇴각명령을 내리게 된다.
후의 페르시아는 결국 살라미스해전과 플라타이아이전투에서 크게 타격을 입으면서 정복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도 채 되기 전에 스파르타는 라이벌 아테네를 꺾기 위해 페르시아에 도움을 빌리고 덕분에 그리스는 소아시아의 식민지를 모두 빼앗기고 마니, 역사란 참 우스울 따름이다.
지금까지 영화 <300>속의 허구와 진실에 대해 살펴보았다. 할리우드 영화 특성인지 몰라도 동양을 비하하면서 서양은 상당히 추켜세우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영화는 영화로서만 봐야 한다. 그 허구와 픽션을 그대로 믿어버리면 사실이 가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5. <불의 문> 한국의 사례
- 백제의 마지막 희망, 5000결사대
서양사의 테르모필라이 전투와 비견될만한 우리 역사의 전투를 꼽으라면 백제 말기에 있던 신라와 백제와의 전투인 황산벌전투의 5000명의 결사대를 꼽고 싶다.
이 싸움은 백제가 멸망의 비운을 맞이한 싸움이었다. 당(唐)나라와 신라의 대군이 동서로부터 침입하여 당군은 백마강(白馬江) 북안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넘어 황산으로 밀려왔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희망으로 일어선 자가 바로 계백(階伯)장군 이었다.
계백은 백제말기의 장군으로서 벼슬은 달솔에 올랐으며, 흥수, 성충과 함께 백제말기의 3충신으로 평가되고 있다. 계백의 이러한 충성심은 후대인들의 칭송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이 되었다. 부여의 의열사(義烈詞)와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에 배향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계백도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의 험조(險阻)한 곳을 택하여 진을 치고 신라군을 맞았다. 이때 계백은 백제가 위태로움을 미리 알아차리고 출전에 앞서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이고 싸움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가 3방면으로 나누어 네 번의 치열한 공격을 가했으나 번번이 막아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도 전사하였다. 이때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이 용감히 전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함으로써 전군의 사기를 북돋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결국 이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백제는 수도 사비성을 잃고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6. 후기
주제로 잡게 된 페르시아전쟁, 그 안에서도 테르모필라이전투는 다분하게 극적인 소재이다. 때문에 스티븐 프레스필드에 의해 <불의 문>이라는 소설이 쓰였고, 만화로 출판되었으며, 만화원작의 동명 영화 <300>도 개봉하여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짚고 넘어간 부분이지만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 속, 또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은 실제 존재했던 인간의 역사이며, 소설 또는 영화 속의 픽션과 사실을 가려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실상은 실제 역사에서도 어떤 것이 진실인지 많이 가려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실제라고 인정받고 있는 주장을 믿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페르시아전쟁은 서구라는 실체를 탄생시킨 전쟁이다. 그 전까지는 어쩌면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고 미개할지 모르던 서구를 등장시켰고, 그들을 당당히 강대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그리스의 자유는 현대의 자유와 거리가 좀 멀었다. 하지만 그들의 추구한 자유라는 이상은 현대와 동일하다고 본다. 언젠가 프랑스의 라파예트 후작 한 말처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 그 누구보다 용감하리라.( 『학습그림세계사』 자유의 강풍과 삼색기 )
자유를 위해 싸운 그리스인들은 기적을 창조했다. 이들의 역사는 훗날 르네상스에 이르러 빛을 발하였고, 그 뒤 장자크 루소 등의 사상가에 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가 페르시아에게 패하였다면? 아마도 프랑스혁명은 그 시기가 늦어졌거나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현재보다 퇴보하거나 극단적이겠지만 어쩌면 역사 속에 묻힌 채 근대에는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참 고 문 헌 -
- 스티븐 프레스필드, 이은희역 / 불의문 / 들녘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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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18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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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5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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