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 박태원의 대표작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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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 론
(1) 작가 연보

2. 본 론
(1) 박태원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2) 작품분석
1) 수염
2) 딱한 사람들
3)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4) 천변풍경
5) 골목안
6) 성탄제
(3) 구인회 활동
(4) 월북과 역사소설

3. 결 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원은 새로운 기법의 모더니즘 소설을 발표하는데, 특히 영화기법을 소설에 수용함으로써 문단의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된다.
5) 구인회의 문학사적 의미
프로의 반영론적 문학관을 부정하면서 표현론적 문학관을 주장했다는 점
구인회 작가들에 의해서 문학은 더 이상 정치나 계몽의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자율적 존재라는 자각이 명확해진다는 점
(4) 월북과 역사소설
1) 민족해방과 역사소설
박태원은 「천변풍경」이후 모더니즘계열의 소설에서 추구하였던 독자적인 특징을 버리고 현실 세계가 객관적으로 부각되는 소설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일명 세태소설이라 불리는 이러한 소설들은 당대 현실의 핵심적인 양상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역사적 변화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전망으로써의 건강한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었다.
박태원은 해방 이후 민족 문학의 열기 속에서 다시 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창작에 의욕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면서 새로운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사명에 대응하는데, 문학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민족 국가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의미하는 바,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적 질서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당대 문학적 과제 역시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며 새로이 건설되어야 할 문학은 ‘계급문학’이 아니라, ‘진보적 민족문학’이어야 하다는 것이 <조선 문학가동맹>에 관여했던 작가들의 기본태도였다. 당시 박태원의 문학적 과제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새로운 민족문학건설의 확립하는 데 있었으며 일련의 역사소설은 그 결과였다.
2)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역사소설
제2차 전국문학자대회가 무산되고 남한에서 좌익 활동이 불법화되자 1946년 초에 이기영, 이태준, 이북명, 임화 등이 월북하기 시작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조선문학가동맹>의 주도 세력들은 거의 월북하지만, 박태원은 그때까지도 서울에 남아 있었다. 그 후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서울에 남아있던 문학가동맹 소속 일부 문인들은 단체를 해산하고 전향을 선언하는데, 박태원 역시 김기림, 정지용, 설정식 등과 함께 보도연맹에 가담하여 그 동안의 정치적 과오를 청산한다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박태원의 월북은 다분히 친분관계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전쟁 중에 서울을 찾아 온 이태준, 안회남, 오장환 등을 따라 돌연 월북하는데, 이들과는 해방 전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특히 이태준과는 작품 경향까지도 비슷했다. 이들의 권유로 박태원은 전쟁의 와중에서 월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월북한 박태원은 이태준의 후원 아래 국립 고전 예술극장의 전속 작가로 선정되어 주로 창극 대본을 쓴 것으로 알려진다. 박태원은 1953년 <조선창극집>을 간행하기도 했으나, 1956년 이태준, 임화 등 주변 문인들이 남로당 일파로 몰려 숙청되자 박태원도 위기를 맞게된다. 그는 함북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용되어 작품 활동을 금지당하다가, 1960년 작가로 복귀했다. 그 후 주로 역사소설을 발표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63년 ‘혁명적 대창작 그루빠’의 지도 아래 창작되어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고 있는 「계명산천을 밝아오느냐」와 「갑오농민전쟁」이 있다.
이들 작품은 철저하게 북한 당국의 정책과 노선에 부합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문예를 보는 기본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이 사회개혁, 혁명을 위해 기능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의 노선과 정책에 철저히 의거한 혁명적 문화예술을 창작한다는 것은 수령님의 혁명사상과 그 구현인 당의 노선과 정책을 창작의 기초 지침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문학예술작품에 당의 유일사상이 정확히 구현되게 하는 근본 조건이다”라는 행동 지침을 시달 시행시킨다.
따라서 북한의 문예정책 일환으로 쓰인 역사소설들은 계급투쟁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표된 박태원의 역사소설도 바로 이러한 북한의 문예정책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구현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다.
3. 결 론
발표문은 박태원의 생애와 구인회 활동, 그리고 모더니즘소설에서 시작해 리얼리즘소설로 오는 과정에 대해 정리했다. 그리고 월북 이후 역사소설에 대해서도 언급해 보았다.
박태원은 착종과 변화가 심한 작가였다. 그는 현실반영의 문학 전통을 부정하고 다양한 실험정신으로 모더니즘 소설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적 소설 장르에 부합하는 작품들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종국에는 그가 부정했던 현실 재현의 리얼리즘 소설로 복귀하고 해방 이후에는 현실이 아닌 과거로 소급하여 역사전기에 관심을 보이더니, 이어 역사소설에만 전념하면서, 급기야 자신의 체제로 북한을 선택하여 월북하였다. 또한 박태원은 서구문화 수용에 상당히 열정적이었으면서도, 동시에 한문과 중국고전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모더니스트였다.
박태원의 모더니즘소설은 공간적 형식의 추구와 영화의 기법, 고현학의 방법론 등을 통해 1930년대 한국모더니즘소설의 전개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주관성의 미학과 새로운 창작 기법의 탐구로 서사성을 중시하던 소설의 전통성을 해체하고, 등장인물의 내면의식과 주관 세계가 전면에 부각되는 비서사성의 새로운 소설영역을 개척했다.
4. 참고문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문학과 지성사 1998
김홍식 「박태원 연구」국학자료원 2000
강진호 류보선 이선미 외 「박태원 소설연구」 깊은샘 1995
깅상태 「박태원 기교와 이데올로기」건국대학교 출판부 1996
이중재 「<九人會>소설의 문학사적 연구」국학자료원 1998
정현숙 「박태원 문학연구」국학자료원 1993
정현숙 「박태원」새미 1995
김명석 「한국 소설과 근대적 일상의 경험」새미 2002
박태원 「성탄제」 을유문화사 1948
박태원 「박태원단편집」 학예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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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0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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