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쾨르가 말하는 기독교인의 역사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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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 2
진보 ----------------------------------------------- 2
모호성 ----------------------------------------------- 3
소망 ------------------------------------------------ 4

Ⅱ. 본론 ----------------------------------------------- 4
1. 폭력(국가적 차원에서)의 특성과 목적 -------------------------- 4
- 폭력의 신성화 --------------------------------------- 4
- 폭력의 사유화 --------------------------------------- 4
-정의 : 폭력의 대의명분 ---------------------------------- 5
- 국가 폭력의 방향성 ------------------------------------ 5
2. 역사의 모호성에서 소망으로 -------------------------------- 6
-정의의 실현 그러나 또 다른 악의 출현의로서의 국가 폭력 -------6
-건축물 : 인간의 위대성과 악함의 두 얼굴 ---------------------- 6
-역사에 대한 물음 그리고 의미 ----------------------------- 7

Ⅲ. 결론 ----------------------------------------------- 7
기독교인의 역사 참여 -------------------------------------- 7
역사 참여의 방법 ---------------------------------------- 7

본문내용

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는 먼저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야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들은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선명해진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사람이 어떤 만남을 갖고 살아갔는가를 묻는 것이다. 염소와 양의 구분은 그들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책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은 자’들에 대한 만남이다. 그 작은 자들을 예수님은 ‘나’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양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 이렇게 묻는다. ‘주님, 우리가 언제 당신의 주린 것과 목마른 것을 보았습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사랑이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역설(逆說)을 발견한다.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놀람은 자신들의 기대에 대한 경악스러운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여기서 갇힌 자, 벗은 자, 목마른 자들을 ‘나’라고 말씀하신다. 양들 편에 선 사람들의 놀람은 바로 그 사실이다. 자신들이 돌보아 준 사람들은 ‘주님’으로 알고 대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아주 하찬은 존재들이며, 무가치한 존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돌아 본 것이다.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 그들을 돌아보아 준 것 뿐이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한 것도, 주님 때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 한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놀람이었다. 주님은 이 땅에서 헐벗었고, 옥에 갇혀있고, 목마르며, 배고프다. 지금도 말이다. 주님은 역사의 모호성을 무시하거나, 타락한 인류의 폐기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직접 그 모호성 안에서 살아가고 실존하신 것이다.
악에 대항하는 비폭력은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따르는 것이다. 폭력은 존재에 대한 거부이며, 비폭력은 존재에 대한 사랑 때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기독교인이 비폭력으로 역사에 참여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역사의 모호성은 모든 것을 거부하거나, 변혁하는 욕망으로 유혹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것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대로 끌어 않은 채 함께 고통하며 인간의 실존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정확히 인간의 실존을 간직한 채 정치권력의 악을 드러내 준다. 잘못된 권력에 대한 거부는 그 권력에 대하여 자유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을 통한 역사 참여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비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으므로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입증하며, 권위에 대한 불복종은 잘못된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항거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은 궁극적으로 율법이 지향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의 구체적인 지침이다. 선한 사마리안 인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진 이웃은 더 이상은 누가 이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이 되라는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폭력을 통한 권력의 불순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실천은 역사의 진보, 즉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세계에로의 역사 참여인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진보는 더 이상 복음과 단절되지 않고,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복음을 가지고 창조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모호성으로 인하여 버려진 작은 자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실천이다. 이것은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성취하셨고,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 범위는 이웃라는 질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서 이웃이 되어 실천하는 삶으로 되어진다. 복음의 삶은 후에 이루어질 인간성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역사의 진보를 향한 역사 참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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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6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7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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