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별곡 해석과 연구의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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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II. 본론
1. <서경별곡> 원문해석
2. <서경별곡>에서의 쟁점
1)어구 해석상의 논란
2)구조적 문제
①단일가설- 3장으로 나누는 견해
4장으로 보는 견해
②합가설
3)창작시기에 관한 논의
4)화자에 대한 논의

III. 결론
- 정리 및 후기

본문내용

8행이 삽입해 들어간 것 신은경, 「서경별곡과 정석가의 공통 삽입가요에 대한 일고찰」, 『국어국문학』96(1986), p.216.
박노준, 「<서경별곡>의 구조와 화자의 태도」, 『고려가요연구』, 새문사, 1990, pp.273~274.
1연과 3연이 애초의 하나의 노래였으나 그 중간에 2연이 끼어들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노래 전체에 유연성을 공급해 주기 위해 편사자가 유형가사(類型歌詞)를 삽입하였다고 주장했다. 신은경은 서경사람인 화자가 대동강가에서 님과 이별하면서 부른 노래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즉, 세 가요의 합성이 아니라 1연과 3연이 한 노래이고, 거기에 2연이 삽입해 들어가게 된, 두 가요의 합성이라고 본 것이다.
5. 창작시기에 관한 논의
<서경별곡>은 작자, 연대미상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속가라는 기록조차도 찾아 볼 수 없지만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① <서경별곡>의 “구슬 연”이 <정석가>와 노래의 일부분이 동일하고, <익재소악부>에 한역 (漢譯)되어 있다는 점
② 조선조에 와서 본 노래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산개(刪改)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 傳日 宗廟樂 如保大平 定大業則善矣 其如俗樂 如西京別曲 男女相悅之詞 *不可 樂譜則不可卒改 依曲調別製歌詞何如 (『성종실록』권215 19년 4월 4일)
김창룡 김창룡, 〈西京別曲 硏究〉, 동방학지, Vol. 69, 1990.
은 '서경'이라는 명칭이 쓰이던 기간과 '대동강'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를 고찰하여 <서경별곡>의 제작연대를 『고려사』 문헌 한도 안에서 '대동강' 이라는 명칭 구사가 제일 먼저 나타난 靖宗 7년(1041년) 이후의 시점으로 책정하고 있다.
정흥교 정흥교,『고려시가 유산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는 첫째 연의 "닷곤 쇼 셩경" 즉, "신축한 작은 서울" 이라는 구절은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고구려의 옛 성지인 평양을 개건하고 그 이름을 '서경'으로 고친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서경별곡>이 평양을 개건하고 '서경'이라고 부르게 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기간에 창작된 노래라고 하였다.
박혜숙 박혜숙,「<서경별곡>연구의 쟁점」, 집문당, 1992
은 <서경별곡>과 <정석가>의 공통부분은 한 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차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지만 익재 소악부가 <서경별곡>이나 <정석가>의 한 부분을 옮긴 것인지 혹은 두 노래와는 별도로 독립적인 노래를 옮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익재 소악부가 두 노래와는 별도의 노래를 옮긴 것이라면 <서경별곡>의 창작 연대는 이제현이 살았던 14세기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고려 전중기에 이미 민간에 정착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계양 이계양, 〈서경별곡의 시간현상 연구〉, 조선대 인문사회과학연구, No.15, 1993.
은 이에 따른다면 서경별곡은 예종 이후의 어느 혼란한 때에 사랑하는 임을 불가피하게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따라오며, 붙잡으며 애걸하는 여인을 매정하게 뿌리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때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즉 그 때는 아무래도 내란보다는 외침에 의거할 것이라 보고 예종대에 전래한 송악의 영향 하에서 복잡과 혼란의 극을 치달았던 고종 때로 추정하고 있다.
또 윤영옥 윤영옥, 『고려시가의 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1
역시 "노래하는 주인공의 위치가 어떠한 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이가 여염가 부인이라면 이렇게 남편에게 충성을 다하는데도 그런 부인을 두고 대동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긴박한 사회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하여 고려역사에 있어 내우외환의 때라 추정한다.
6. 화자에 대한 논의
작품 내에서는 화자를 복수로 보는 경우와 단일인으로 보는 경우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의 입장은 첫 번째 단락과 세 번째 단락의 화자를 여성으로, 두 번째 단락의 화자를 남성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많은 비판을 받아왔으며, 대부분의 논자들은 여성 단일 화자로 보고 있다.
작품 밖의 화자, 즉 작자에 관한 논의는 주로 사회사적인 배경과 연관하여 논해졌다. 고려 후기 이별의 상황, 거기에다 ‘님’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먼 곳으로 떠난다. 다음 상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화자를 단일인으로 보는 경우의 상황>
① 공녀제도에 의한 여인 수난의 이별
② 남자의 출정 또는 강화천도로 인한 이별
③ 남부여대(男負女戴, 가난한 사람이나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의 호구지책으로 인한 이별
④ 빈번한 교역으로 인한 이별
Ⅲ. 결론
<서경별곡>은 고려가요라는 것 외에 작가라든가 창작시기에 관한 기록이 없다.
원문 해석상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인 ‘쇼셩경’과 ‘괴시란’, ‘ 럼난디’ 는 양주동의 설에 따라 각각 ‘서경(평양)’, ‘사랑하신다면’, ‘음탕한지’ 로 해석했다.
또, 이 작품의 구조를 3장으로 나눌 것인지 4장으로 나눌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3장 쪽으로 기울었다.
단일가설이 아니라고 보았을 경우에 합가설이 주장될 수 있는데, 합가설에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세 개의 서로 다른 노래의 합성이라고 보는 경우와 1연 3연이 하나의 노래이고 2연이 삽입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조는 전자로 결론을 내렸다. 창작 시기는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데 우리는 2장의 구슬곡이 <정석가>의 마지막 부분에도 삽입되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서경별곡>이 그때로부터 오래전에 창작된 것이라고 생각되어, 10세기 말~ 11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정리하면, <서경별곡>은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에서 오는 아픔을 노래한 3장의 형식을 가진 고려가요로 고려 이별시가라고 본다.
◎ 참고문헌
<고려가요 해설 - 정읍사, 서경별곡, 청산별곡의 난해어구에 대하여>, 리득춘, 중국조선어문, 1988
<서경별곡의 종합적 고찰>, 양태순, 국어국문학회, 2005
<서경별곡의 시적 구조와 화자>, 허왕욱, 한국문학교육학회, 2003
<서경별곡 어석>, 권재석, 한민족어문학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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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8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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