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시대적, 이론적 배경
2. 작가와 내면세계
3. 작품 분석
(1) 줄거리
(2) 장국영과 아비정전 소개
1) 아비정전
2) 장국영
(3) 인물분석 -'나'를 중심으로
(4)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적 장치와 효과
1) 인터넷 게시물의 인용
2) 피시방이라는 공간
3) 영수증을 모으는 아내의 버릇
4) '개토 PC방'→'게토 PC방'
5) 플래시 몹(flash mob)
6) 사스(SARS)와 마스크
Ⅲ.결론
Ⅱ. 본론
1. 시대적, 이론적 배경
2. 작가와 내면세계
3. 작품 분석
(1) 줄거리
(2) 장국영과 아비정전 소개
1) 아비정전
2) 장국영
(3) 인물분석 -'나'를 중심으로
(4)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적 장치와 효과
1) 인터넷 게시물의 인용
2) 피시방이라는 공간
3) 영수증을 모으는 아내의 버릇
4) '개토 PC방'→'게토 PC방'
5) 플래시 몹(flash mob)
6) 사스(SARS)와 마스크
Ⅲ.결론
본문내용
뒤 뿔뿔이 흩어지는 모임을 뜻하는 신조어로 전혀 모르는 사람, 혹은 온라인으로만 아는 사람끼리 e메일로 연락을 취해서 어떤 장소로 모이면 모버레이터(지시서를 나눠주는사람)가 지령이 담긴 몹 지시서를 나눠주면 그것을 읽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플래시 몹은 새로운 사회적 일탈의 한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다. 플래시 몹의 행동 수칙은 다음과 같다.
1. 플래시 몹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참여한다.
2. 플래시 몹을 정치적, 상업적, 공익적, 특별한 이익 창출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3. 플래시 몹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묻지 않는다.
4. 플래시 몹 진행 후 해산 시에 무리지어 흩어지거나 뛰지 않는다.
5. 플래시 몹 현장에서 '플래시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6. 플래시 몹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7. 플래시 몹은 개인행동이 아닌 집단행동이므로 개인행동을 자제한다.
이 행동수칙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플래시 몹은 정치적, 상업적, 공익적, 특별한 이익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다. 플래시 몹을 하는 사람들은 단지 재미를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며 ‘의미가 없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플래시 몹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익명의 군중에 불과하다. 연락을 해서 동일한 복장을 입고 만나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다만 그 뿐이다. 그들은 플래시 몹을 끝낸 뒤에도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제각각 갈 길을 간다. 그러므로 플래시 몹 또한 관계의 단절을 나타내는 하나의 장치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쓸모있는 것들만이 판치는 시대에 어떤 유용성에도 복무하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벌이는 무언의 시위 같기도 하다.
6) 사스(SARS)와 마스크
장국영의 장례식은 그가 죽은 지 일주일 후 치러졌다. 나는 피시방 카운터에 앉아 동영상으로 그것을 보았다. 홍콩에는 비가 내렸고 검은 상복을 입은 수많은 조문객들의 입에는 마스크가 착용되어 있었다. 사스 때문이었다. 조문객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침묵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국영의 장례식 때 조문객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사스 때문이었다. 사스는 호흡기 분비물이나 체액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전파되는 병이다.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그들은 대화를 하기가 불편해진다. 그들의 감정적 소통은 대화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장국영이라는 문화적 공감대를 통해서만 형성된다. 그리고 ‘내’가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는 현기증을 느끼다가 마스크를 쓰자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졌다고 생각하는 구절은 이런 단절된 상황이 오히려 편안하고 익숙한 현대인의 단면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례식장의 검은 양복들이 주인공에게 마치 빚 독촉을 하는 추심원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하고, 마지막에 나온 플래시 몹의 광경과도 일면 닮아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Ⅲ. 결론
요새는 시골의 어딜 가든 인터넷이 깔려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인터넷이 사회 전반에 걸쳐 속속들이 보급되면서 우리는 개인과의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불특정 다수와 관계를 맺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한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홈페이지와 카페와 블로그들에는 침묵의 여백이 없다. 한 쪽이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한 쪽이 침묵할 때에서야 이야기라는 것은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인데 많은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채팅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절된 상태를 은폐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밖에 기능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껍데기 뿐인 무수한 관계에서 공허함과 소외감을 느낀 대다수의 인간들은 인간적인, 진정한 소통에 목말라하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지. 평생 단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야.
‘발 없는 새’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아비가 여자를 꼬실 때 하는 이야기로서 너에게 정착하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발 없는 새’는 영화 속에서는 아비 자신을 뜻하는 것이며, 소설에서는 그 뿐 아니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주인공과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의미한다. '장국영이 죽었다고?'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소통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부분적으로 관계의 단절을 겪고 있다.
발 없는 새는 태어날 때부터 바람 속을 날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새는 이미 죽어있었어.
바람 속에서 쉬는 것은 안식이 되지 못한다. 아무 것도 발 디디지 못하는 허공에서는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발 없는 새’는 땅의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못하기에 죽어있는 것이며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주인공 아비가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언제나 관계들 사이에서 겉돌기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비는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난 사랑이 뭔지 몰랐지만 이젠 알 것 같아.'라고. 이 말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의미라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넓게 해석하자면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생각일 수도 있다. 결국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않은 아비는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했고 그는 이미 죽어있는 발 없는 새와 같았다.
모든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그 관계를 통해 실존을 인식하고, 자기 정체성을 깨달으며,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반드시 유용한 관계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일면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 인터넷에서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삶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플래시 몹에 참여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핑계댄 것이 의미하듯, 사실 우리는 결국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의 적자(嫡子)들이 아닌가. 그렇기에 사회에서 소외된 그들이 마지막에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 플래시 몹이란 집단적인 행위로 인해 일회적인 유대를 가지고 삶의 활기를 되찾는 것도 사실 그들 나름의 삶과 소통의 방식이 아닐까.
참고문헌
각주에 기재된 문헌 참고
플래시 몹은 새로운 사회적 일탈의 한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다. 플래시 몹의 행동 수칙은 다음과 같다.
1. 플래시 몹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참여한다.
2. 플래시 몹을 정치적, 상업적, 공익적, 특별한 이익 창출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3. 플래시 몹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묻지 않는다.
4. 플래시 몹 진행 후 해산 시에 무리지어 흩어지거나 뛰지 않는다.
5. 플래시 몹 현장에서 '플래시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6. 플래시 몹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7. 플래시 몹은 개인행동이 아닌 집단행동이므로 개인행동을 자제한다.
이 행동수칙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플래시 몹은 정치적, 상업적, 공익적, 특별한 이익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다. 플래시 몹을 하는 사람들은 단지 재미를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며 ‘의미가 없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플래시 몹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익명의 군중에 불과하다. 연락을 해서 동일한 복장을 입고 만나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다만 그 뿐이다. 그들은 플래시 몹을 끝낸 뒤에도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제각각 갈 길을 간다. 그러므로 플래시 몹 또한 관계의 단절을 나타내는 하나의 장치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쓸모있는 것들만이 판치는 시대에 어떤 유용성에도 복무하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벌이는 무언의 시위 같기도 하다.
6) 사스(SARS)와 마스크
장국영의 장례식은 그가 죽은 지 일주일 후 치러졌다. 나는 피시방 카운터에 앉아 동영상으로 그것을 보았다. 홍콩에는 비가 내렸고 검은 상복을 입은 수많은 조문객들의 입에는 마스크가 착용되어 있었다. 사스 때문이었다. 조문객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침묵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국영의 장례식 때 조문객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사스 때문이었다. 사스는 호흡기 분비물이나 체액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전파되는 병이다.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그들은 대화를 하기가 불편해진다. 그들의 감정적 소통은 대화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장국영이라는 문화적 공감대를 통해서만 형성된다. 그리고 ‘내’가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는 현기증을 느끼다가 마스크를 쓰자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졌다고 생각하는 구절은 이런 단절된 상황이 오히려 편안하고 익숙한 현대인의 단면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례식장의 검은 양복들이 주인공에게 마치 빚 독촉을 하는 추심원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하고, 마지막에 나온 플래시 몹의 광경과도 일면 닮아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Ⅲ. 결론
요새는 시골의 어딜 가든 인터넷이 깔려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인터넷이 사회 전반에 걸쳐 속속들이 보급되면서 우리는 개인과의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불특정 다수와 관계를 맺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한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홈페이지와 카페와 블로그들에는 침묵의 여백이 없다. 한 쪽이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한 쪽이 침묵할 때에서야 이야기라는 것은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인데 많은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채팅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절된 상태를 은폐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밖에 기능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껍데기 뿐인 무수한 관계에서 공허함과 소외감을 느낀 대다수의 인간들은 인간적인, 진정한 소통에 목말라하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지. 평생 단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야.
‘발 없는 새’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아비가 여자를 꼬실 때 하는 이야기로서 너에게 정착하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발 없는 새’는 영화 속에서는 아비 자신을 뜻하는 것이며, 소설에서는 그 뿐 아니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주인공과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의미한다. '장국영이 죽었다고?'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소통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부분적으로 관계의 단절을 겪고 있다.
발 없는 새는 태어날 때부터 바람 속을 날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새는 이미 죽어있었어.
바람 속에서 쉬는 것은 안식이 되지 못한다. 아무 것도 발 디디지 못하는 허공에서는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발 없는 새’는 땅의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못하기에 죽어있는 것이며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주인공 아비가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언제나 관계들 사이에서 겉돌기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비는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난 사랑이 뭔지 몰랐지만 이젠 알 것 같아.'라고. 이 말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의미라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넓게 해석하자면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생각일 수도 있다. 결국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않은 아비는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했고 그는 이미 죽어있는 발 없는 새와 같았다.
모든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그 관계를 통해 실존을 인식하고, 자기 정체성을 깨달으며,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반드시 유용한 관계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일면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 인터넷에서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삶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플래시 몹에 참여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핑계댄 것이 의미하듯, 사실 우리는 결국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의 적자(嫡子)들이 아닌가. 그렇기에 사회에서 소외된 그들이 마지막에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 플래시 몹이란 집단적인 행위로 인해 일회적인 유대를 가지고 삶의 활기를 되찾는 것도 사실 그들 나름의 삶과 소통의 방식이 아닐까.
참고문헌
각주에 기재된 문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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