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의 연구, 임나일본부설의 형성, 다양한 임나일본부설, 광개토대왕릉비를 토대로한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와 비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치명적 결함, 고대한일관계사 재정립 분석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임나일본부설의 연구, 임나일본부설의 형성, 다양한 임나일본부설, 광개토대왕릉비를 토대로한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와 비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치명적 결함, 고대한일관계사 재정립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임나일본부설의 연구

Ⅱ. 임나일본부설의 형성

Ⅲ. 다양한 임나일본부설
1.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2. 가야의 왜인설(加耶의 倭人說)
3. 분국설(分國說)
4.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
5.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Ⅳ. 광개토대왕릉비를 토대로한 임나일본부설

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와 비판
1. 임나일본부설의 개요
2. 근거
1) 일본서기의 기사
2) 중국사서에 나오는 왜5왕기사
3) 칠지도명문
3. 반 임나일본부설의 제관점
1) 대세론
2) 분국설
3) 비류백제설
4) 구주왕조설

Ⅵ.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치명적 결함

Ⅶ. 고대한일관계사 재정립
1. 일본학계의 비판적 시각 대두
2.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한 임나일본부설의 부정
3. 가야사의 복원

참고문헌

본문내용

대에는 경상도 가야 지방 외에 대마도나 일본열도도 가라라 불렀다.
둘째, 송서 왜전에 나오는 왜왕을 일본열도 왜왕으로 오해하였다. 송서 왜전에 나오는 왜왕은 대화왜왕이 아니고 대마도에 치소를 두고 당시 일본열도 등지를 통제한 임나연정왕이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를 모두 일본열도 방면의 왜로 오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는 대부분 마한이나 구태백제를 지칭한 것이고 대마도나 일본열도왜를 지칭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고기에는 임나연정도 임나로 적혀 있다. 대마도를 뜻하는 임나와 임나연정을 뜻하는 임나는 의미가 전혀 다르므로 꼭 구별을 해야 한다. 아래에 나오는 임나는 대마도라는 뜻이 아니고 임나연정 또는 임나연정 지역이라는 뜻이다.
「임나는 원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었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게 되었다..중략..영락 10년(A.D 400년)에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셋째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부의 성격과 존재이유를 오해하였다. 일본부는 출선기관설이 주장한 것처럼 대화왜가 한반도 가야지방에 둔 군정기관이 아니고 임나(대마도)에 주재한 대화왜 신또는 장군들의 주재소이다. 그리고 임나연정 시대에 나오는 일본부와 흠명천황 시대에 나오는 일본부는 그 성격과 존재이유가 전혀 달랐다.
임나는 한반도 가야지방이 아니고 대마도이다. 그리고 웅략천황기에 나오는 일본부는 임나연정왕의 요구에 의하여 임나(대마도)에 파견된 대화왜 신의 주재소였고, 흠명천황기에 나오는 일본부는 신라가 대마도 북안에 있던 소국남가라, 록기탄, 임나국 등을 점령하여 백제와 대화왜와의 해상통로를 위협하자 북적신라를 대마도에서 몰아내어 백제와 대화왜와의 해상통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대화왜가 임나에 파견한 신의 주재소였다. 즉 임나를 가야 지방으로, 일본부를 가야지방을 다스린 군정기관으로 본 학설은 일본서기나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문제점 외에도 왜가 임나[가야]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적 지배를 하였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 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만 가야지역 교분 발굴 자료들에 의하면 4세기 이전에 출토되어 이 지역의 독특한 유물 문화가 5-6세기까지도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즉, 일본에 의하여 지배당하였다는 사실이 그 문화 유물에 반영된 바가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서의 문헌 사료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반증되는 것이다. 특히 우수한 철제 갑옷을 생산한 가야 연맹을 당시 문화적으로 뒤떨어지고 철을 수입한 왜가 지배하였다는 말은 이치에 맡지 않다. 또 당시 일본열도는 통일 정권을 형성하지 못한 채 여러 소국으로 분립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만약에 건설했다 하더라도 왜 건설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일제가 임나일본부설을 강조한 것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역사의 운명이라는 것을 내세워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술책이다. 결국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Ⅶ. 고대한일관계사 재정립
1. 일본학계의 비판적 시각 대두
대표적인 예
平野邦雄:분국설과 임나일본부설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유보설)
井上秀雄:임나일본부는 야마토정권과 무관(#백제나 가야와의 관계에서 파악)하다.
일부의 교과서에서도 개정의 움직임.註로 처리
그러나 일본인 일반의 인식은 아직 교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으며, 한국인에 대한 우월의식의 중요한 멘탈리티를 형성한다.
2.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한 임나일본부설의 부정
\'임나일본부\'의 명칭문제(<<백제본기>><<일본서기>>)
일본이라는 칭호는 7세기 이후에 비로소 쓰이는 것으로, 이는 8세기초반 황국사관에 따라 일본서기를 편찬해가는 과정에서 \'일본\'을 첨가한 것이다.
원래는 백제가 가야지배의 거점인 임나지역에 파견한 백제관인인 \'임나집사\'를 \'임나일본부\'라 개작하였다.
백제와 가야, 왜의 실질적 관계
백제와 가야는 상하관계, 백제와 왜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왜와 가야의 관계는 백제를 매개로 한 간접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서기>>편찬과정에서 백제본기에 나오는 주체를 백제에서 \'일본\'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임나일본부\'\'임나일본현읍\'등의 칭호가 조작되고 왜의 가야지배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3. 가야사의 복원
전기 가야 연맹체
국제 교역의 중개지역이라는 유리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해안의 가야 제국이 구야국(김해)을 중심으로 하여 완만한 연맹체를 형성, 국제교역을 통하여 선진 문물이 대량으로 들어와 문화수준이 앞섰지만, 정치적 통합력이 미약하였다.
4-5세기초에 걸쳐 고구려. 백제간의 패권다툼에서 고구려가 주도권을 장악해가면서, 백제를 통해서 활로를 찾아가고 있던 가야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와해되었다.
후기 가야 연맹체
5세기 후반 가야의 중심세력 일부가 내륙지역으로 이동하여 풍부한 철광 등을 이용하여,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 나감으로, 남제와 통교하고 백제, 신라와 결호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는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6세기초에는 백제, 신라, 왜와의 세력관계속에서 독자적 지위를 유지해 갔으나, 결국 신라와 백제에 의해서 분할 점령됨으로써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김정학 : 임나와 일본 / 1977
김현구 : 임나일본부의 실체, 한길역사강좌 / 1988
김석형 : 초기조일관계연구 / 1966
강봉룡 : 고대한일관계사, 북한의 역사인식, 한길사 / 1990
김현구 : 한국사시민강좌, 임나일본부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일조각 / 1993
임나일본부와 왜, 동출판 / 1973
이진희 : 사상과 정책, 임나일본부설의 제문제, 경향신간사 / 1984
이영식 : 우리역사를 의심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의 역사, 서해문집 / 2002
  • 가격5,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8.07.29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498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