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
2.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관한 소고
3. 변명
4. 크리톤
5. 파이돈
6. 향연
7. 나오며
2.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관한 소고
3. 변명
4. 크리톤
5. 파이돈
6. 향연
7. 나오며
본문내용
어있는 대화는 아니었나 생각된다.
6. 향연
이 이야기((소크라테스가 죽기 전))는 아폴로도로스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그의 친구와 대화이다. 그 속에 아가톤(그의 집에서 잔치를 연 비극시인),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데모스 파이드로스(히포콘드리에 걸린 문필가), 파우사니아스(아가톤의 애인;그 당시 동성애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에뤼크 시마코스(의사) 아리스토파네스(희곡시인), 알키비아데스(재기발랄하고 방종하고 악명 높으며 당시 아테네에서 권력의 정상에 있던 사람)이 등장한다. 아포로도로스가 시내로 길을 가면서 친구에게 아가톤의 집에서 열렸던 향연에 참석하여 논의하였던 소크라테스와 그 외 사람들의 이야기(아리스토데모스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다시 그에게 해주는 형식을 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잔치 이틀째 되는 날 참석을 한다. 여기서 에뤼크시마코스가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흥을 돋구기보다는 대화나 하면서 즐기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대화주제는 여지껏 칭송되어 오지 않은 에로스에 대한 것으로 정해진다. 여러 명의 사람들의 주장이 오가지만, 소크라테스의 입장(소크라테스를 위한 책)을 주로 하는 만큼 소크라테스의 얘기만 간추리려고 한다.
에로스는 첫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이다. 둘째, 그 대상은 현재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본질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대상의 무엇이라는 것이다( 예컨데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고 형은 나의 형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 일 때 사랑하는 것이지 소유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것으로는 키가 큰 사람이 키가 크기를 바라지 않고 힘센 사람이 힘이 세지길 바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에로스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지혜 또는 선)일 것이다. 그렇다면 애로스는 신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실제한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음)라는 부인의 입을 빌려 여기에 대한 변명을 한다. 에로스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정령이라고. 그래서 에로스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가사적인 존재와 불사적인 존재의 중간자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지혜)를 사랑하는 애지자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에로스가 이렇듯 중간자인 것은 그의 아버지는 현명하고 그 수단도 풍부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지혜가 없고 무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사랑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일까? 다시금 덧붙이길 사랑은 선한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구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 속에서 잉태하게 하는 것이고 이러한 잉태는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은 아름다움 속에서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생식이 사랑의 대상일까? 가사적인 존재가 획득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생식은 영원한 불사성에 가장 접근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부인은 말한다.
"올바른 길을 찾으려는 사람은 젊었을 때에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명상에 열중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내자의 적절한 인도를 받는다면, 그는 우선 한 특정한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에 빠져야 하고 그 사람과 협력하여 고상한 감정을 가져야 합니다. 후에 그는 한사람의 육체적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흡사함을 알게 될 것이고, 외형적 아름다움을 그의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모든 육체에 나타난 아름다움은 동일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육체적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한 특정한 사람에 대한 강렬한 정열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러한 정열은 보다 낮은 것이고 사소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단계는 그가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도 영혼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육신은 별로 아름답지 않지만 영혼은 유덕한 사람을 만나면 그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고, 이 젊은이의 향상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활동과 제도 속에 있는 아름다움도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여기서도 모든 아름다움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육체적 아름다움이란 전체적으로 비교적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소년에의 사랑은 육체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해 도덕적 아름다움으로, 도덕적 아름다움에서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옮아가야 하는 것이 사랑의 행로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연설이 끝나자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의 시비로 에로스에 대한 대화는 환기가 되고, 소크라테스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는 소크라테스를 비난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결국에는 소크라테스의 찬양으로 결말지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문수님의 해설을 조금 인용한다.
[향연을 읽으면 동성애에 관한 언급이 많고 사실상 사랑의 예찬에서도 그 주요한 대상은 동성애가 되고 있다. 이것은 동성애가 허용되던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읽어야 할 것이고 이 대화편의 궁극적 주제는 지상에서의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이데아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임을 절제하고 읽는다면 반도덕적이라는 느낌은 사라지리라고 믿는다.]
7 . 나오며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변명, 크리톤, 파이돈 부분이 그의 죽음까지의 이야기이고 향연은 하나의 주제부각과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찬양하기 위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철학과 사랑과 지혜와 용기에 대한 고찰은 너 자신만을 알게 하던 그를 더더욱 알고 싶게 한다. 사실 본인이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를 무릅쓰고 조금이나마 소크라테스의 옷자락을 붙잡아 지면으로 모셔온 것이다. 잠시나마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로 인해 진정한 즐거움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칠까 한다.
6. 향연
이 이야기((소크라테스가 죽기 전))는 아폴로도로스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그의 친구와 대화이다. 그 속에 아가톤(그의 집에서 잔치를 연 비극시인),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데모스 파이드로스(히포콘드리에 걸린 문필가), 파우사니아스(아가톤의 애인;그 당시 동성애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에뤼크 시마코스(의사) 아리스토파네스(희곡시인), 알키비아데스(재기발랄하고 방종하고 악명 높으며 당시 아테네에서 권력의 정상에 있던 사람)이 등장한다. 아포로도로스가 시내로 길을 가면서 친구에게 아가톤의 집에서 열렸던 향연에 참석하여 논의하였던 소크라테스와 그 외 사람들의 이야기(아리스토데모스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다시 그에게 해주는 형식을 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잔치 이틀째 되는 날 참석을 한다. 여기서 에뤼크시마코스가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흥을 돋구기보다는 대화나 하면서 즐기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대화주제는 여지껏 칭송되어 오지 않은 에로스에 대한 것으로 정해진다. 여러 명의 사람들의 주장이 오가지만, 소크라테스의 입장(소크라테스를 위한 책)을 주로 하는 만큼 소크라테스의 얘기만 간추리려고 한다.
에로스는 첫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이다. 둘째, 그 대상은 현재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본질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대상의 무엇이라는 것이다( 예컨데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고 형은 나의 형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 일 때 사랑하는 것이지 소유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것으로는 키가 큰 사람이 키가 크기를 바라지 않고 힘센 사람이 힘이 세지길 바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에로스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지혜 또는 선)일 것이다. 그렇다면 애로스는 신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실제한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음)라는 부인의 입을 빌려 여기에 대한 변명을 한다. 에로스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정령이라고. 그래서 에로스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가사적인 존재와 불사적인 존재의 중간자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지혜)를 사랑하는 애지자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에로스가 이렇듯 중간자인 것은 그의 아버지는 현명하고 그 수단도 풍부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지혜가 없고 무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사랑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일까? 다시금 덧붙이길 사랑은 선한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구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 속에서 잉태하게 하는 것이고 이러한 잉태는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은 아름다움 속에서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생식이 사랑의 대상일까? 가사적인 존재가 획득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생식은 영원한 불사성에 가장 접근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부인은 말한다.
"올바른 길을 찾으려는 사람은 젊었을 때에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명상에 열중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내자의 적절한 인도를 받는다면, 그는 우선 한 특정한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에 빠져야 하고 그 사람과 협력하여 고상한 감정을 가져야 합니다. 후에 그는 한사람의 육체적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흡사함을 알게 될 것이고, 외형적 아름다움을 그의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모든 육체에 나타난 아름다움은 동일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육체적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한 특정한 사람에 대한 강렬한 정열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러한 정열은 보다 낮은 것이고 사소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단계는 그가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도 영혼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육신은 별로 아름답지 않지만 영혼은 유덕한 사람을 만나면 그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고, 이 젊은이의 향상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활동과 제도 속에 있는 아름다움도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여기서도 모든 아름다움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육체적 아름다움이란 전체적으로 비교적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소년에의 사랑은 육체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해 도덕적 아름다움으로, 도덕적 아름다움에서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옮아가야 하는 것이 사랑의 행로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연설이 끝나자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의 시비로 에로스에 대한 대화는 환기가 되고, 소크라테스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는 소크라테스를 비난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결국에는 소크라테스의 찬양으로 결말지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문수님의 해설을 조금 인용한다.
[향연을 읽으면 동성애에 관한 언급이 많고 사실상 사랑의 예찬에서도 그 주요한 대상은 동성애가 되고 있다. 이것은 동성애가 허용되던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읽어야 할 것이고 이 대화편의 궁극적 주제는 지상에서의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이데아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임을 절제하고 읽는다면 반도덕적이라는 느낌은 사라지리라고 믿는다.]
7 . 나오며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변명, 크리톤, 파이돈 부분이 그의 죽음까지의 이야기이고 향연은 하나의 주제부각과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찬양하기 위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철학과 사랑과 지혜와 용기에 대한 고찰은 너 자신만을 알게 하던 그를 더더욱 알고 싶게 한다. 사실 본인이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를 무릅쓰고 조금이나마 소크라테스의 옷자락을 붙잡아 지면으로 모셔온 것이다. 잠시나마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로 인해 진정한 즐거움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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