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배경,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발생,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전개,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 분석(농민군의 격문, 집강소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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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배경,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발생,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전개,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 분석(농민군의 격문, 집강소 조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의 배경

Ⅲ.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의 발생과 전개

Ⅳ.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
1. 지도부
2. 참가층

Ⅴ. 농민군의 격문

Ⅵ. 집강소의 성립과 조직형태
1. 집강소의 성립
2. 집강소의 조직형태

Ⅶ.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유무를 논하지 아니하였다. 도소를 또한 대의소라고도 칭하고, 그 도로에 있는 것은 행군양소라고도 칭하였다. 그 전하는 문자는 영지라고 칭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농민군이 점령하는 매읍에 통치를 담당하기 위한 접을 설치하고 한 사람의 접주를 뽑아 태수의 일을 보게 하면서 이를 집강이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농민군의 집강의 임명은 그 고을 의 수재가 도망하고 없거나를 불문하고 그에 관계없이 농민군이 점령지에 일방적으로 임명하여 급폐민막을 고치고 취치를 하도록 한 것이었다. 제1차 농민전쟁 시기의 점령지마다 각군의 특수성에 따라 읍폐민막의 내용은 달랐을 것이나 그 폐정의 기본구조는 거의 같았기 때문에 점령지 각군의 폐정개혁의 내용도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한편 집강소의 설치를 승인했던 전라관찰사 김학진 등 관군측은 농민군의 집강소를 종래의 면·리집강의 군현으로의 격상으로 이해하였다. 김학진이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허가한 것도 부득이한 조건에서 이 면·리집강을 모형으로 한 것이었다. 전주화약 후인 6월 초3일에 전라관찰사 김학진이 농민군의 발호에 대하여 보낸 회유문의 일부에는 너희들이 거주하는 면리에 각각 집강을 설치했고 너희들의 억울함이 말할만한 것이 있으면 해당 집강을 경유하여 감영에 소해서 공홍을 기다릴 것이라는 구절이 이를 증명해준다.
당시 전라도를 포함한 남쪽지방에서는 집강이 존재했으며, 이것은 향임의 일종으로서 양인상층의 지식 있는 부농으로 임명되고 있었다. 그 직무로는 행정의 자문과 풍교의 기강을 세우는 데 협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김학진의 집강소 승인은 군수 등 수령의 행정에 자문을 하고 농민군의 기율을 세워 행패가 없도록 할 것을 의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갑오농민전쟁 시기의 전라도 53개 군현에 설치되어 7개월간 활동한 집강소의 기원은 제 1차 농민전쟁 때의 농민군의 점령지에서 읍폐민막의 긴급한 폐정개혁을 담당할 책임자로서 농민군이 임명한 동학조직의 집강과 그 정무처로서의 도소, 대의소, 행군의소, 등을 주된 기원으로 하고, 여기에 다시 종래의 면·리집강을 군 수준으로 한 단계 격상시킨 것을 보조적 기원으로 하여 성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집강소의 조직은 4개 기관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집행기관, 의사기관, 집강소호위군, 방조기관이 그것이다. 집강소의 집행기관은 갑오약력에 의하면 집강, 서기, 성찰, 집사, 동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집강은 집강소의 총책임자이면서 동시에 집행책임자였다. 집강은 주로 동학의 접주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오하기문에 의하면 태수의 일을 행했으며, 수령의 일을 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갑오약력에 의하면 특히 농민군의 지위가 강한 지역에서는 소위 읍재는 오직 이름만 있고 행정을 할 수 없었으며, 심하면 읍재를 추방하기도 했다. 집강소의 집강은 농민이 임명한 태수이자 수령이며 군수이자 읍제가 되는 것이다.
서기는 집강소의 농민개혁을 문부에 작성하고 정리하며, 또한 관리의 문부를 검열하고, 집강의 비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직책으로 여겨진다. 성찰은 집강소의 농민개혁에서 치안과 경비를 담당하고 순찰과 감찰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집사는 집강소에서 행정과 공사를 관리했으며 집강소의 행정개혁, 인민소장의 처리 등 직접적인 대민사업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동몽은 주로 청소년으로 구성되어서 다른 집강소와 각기 다른 관 사이의 전령과 운반을 담당하고, 집강소의 간부를 호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집강소의 의사기관은 오지영의 동학사에서 의사원 약간인을 두었으며라고 한 곳에서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집강이 단독으로 정책결정과 의사결정을 하면 독재로 변질될 수가 있고, 농민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위험이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의결기관으로서 약간의 의사원을 두어 충분한 토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집강소의 호위군은 각 군의 집강소의 농민군 무력이었다. 농민군은 화약 후에 각각 자기의 출신 군에 돌아가 무장을 풀지 않고 그대로 농민군 체제로 지속하면서 집강소를 설치한 다음 그 집강소의 무력으로 활동하였다. 뿐만아니라 집강소의 설치 후에는 농민군을 증모하고 각 군의 무기고를 열어 농민군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집강소의 방조기관은 집강소에 종소된 종래의 관아 대소관리들의 행정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동학사에서 태소관리들은 그를 방조하여 폐정개혁에 착수케 되었으며라고 한 곳에서 집강소가 폐정개혁을 주도하여 담당하고 종래의 관리들은 이에 대한 방조기관으로 전락하여 집강소의 보조적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군의 집강소들을 총괄하는 대도소는 두 곳에 설치되었다. 전주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좌도와 전라도 전체를 지휘하였다. 여기서 지휘한 이는 전봉준이다. 남원에도 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우도를 지휘했는데 이곳은 김개남이 맡았다. 전라관찰사 김학진은 관찰사가 정무를 보는 장소인 선화당을 전봉준에게 내어주고 자기는 스스로 징청각에 거처하면서 매사를 전봉준을 경유했다고 하는 기사에서 농민군의 강성함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집강소의 조직체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관되고도 통일된 농민군들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는 기반이라는 것과 나름대로 자율적 조직임을 알 수 있다.
Ⅶ. 나가며
우리나라의 19세기는 조선왕조와 더불어 중세사회가 해체되는 시기다. 중세사회를 규정해왔던 봉건주의 체제가 새로운 질서로 대체되는 일대 전환기라 하겠다. 그리고 19세기는 민란의 세기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1894년의 농민항쟁은 근대에 들어서는 조선 봉건체제의 해체를 결정 지웠던 사건임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에 크게 저항한 농민전쟁이었다는 데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참고문헌
김용섭(1992), 봉건사회 최말기의 농민운동과 그 지향,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고석규(1988), 19세기 농민항쟁의 전개와 변혁주체의 성장, 1894년 농민전쟁 연구
신용하(1993), 집강소의 성립과 개혁의 성격, 동학농민혁명과 사회,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한국 역사 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 연구(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 연구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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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8.2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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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77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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