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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 25전쟁]한국전쟁(6 25전쟁)의 발발, 한국전쟁(6 25전쟁)의 원인, 한국전쟁(6 25전쟁)의 배경, 한국전쟁(6 25전쟁) 경과, 한국전쟁(6 25전쟁) 피해, 한국전쟁(6 25전쟁) 영향, 한국전쟁(6 25전쟁) 결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한국전쟁(6 25전쟁)의 발발

Ⅲ. 한국전쟁(6 25전쟁)의 원인 및 배경

Ⅳ. 한국전쟁(6 25전쟁)의 경과
1. 제1단계
2. 제2단계
3. 제3단계
4. 제4단계

Ⅴ. 한국전쟁(6 25전쟁)의 피해
1. 산업피해
2. 인명피해

Ⅵ. 한국전쟁(6 25전쟁)의 영향

Ⅶ. 한국전쟁(6 25전쟁)의 결과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원 약 7,700여 명 등도 포함한 수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약 3만 명을 생존자로 본다면 인민군 총 사망자는 거의 유엔 측 발표인 52만 명에 근접한다. 그렇다면 북조선에서의 사망, 실종(월남인 제외)으로 인한 인명손실은 최소, 민간인 48만 인민군 52만을 합하여 약 100만 명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1949년 전체 인구의 약 10.4%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또 전쟁기간 동안 전체 북조선 인구의 직접적인 감소는 민간인 120만 명과 인민군 사망자 52만을 합쳐 약 172만 명, 전체 인구의 17.9%로 추산된다. 인구 증가율을 고려한다면 간접적인 인구손실은 규모가 훨씬 커질 것이다. 예를 들면 와다 하루키는 인구증가율을 고려하여 1953년 12월 인구가 1949년에 말에 비해 159만 7천 명의 자연 증가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비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와의 비교에는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간접적인 피해를 전쟁으로 인한 사망, 행방불명, 월남 등의 요인에 의한 직접적인 인구감소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한편으로 전쟁, 특히 동족간의 전쟁이 갖는 여러 가지 특수한 조건들은 간접적인 인구손실의 계산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전쟁기간 북조선의 인구손실 172만 명(월남자 등 포함)은 간접적인 인구손실을 감안하더라도 커밍스와 할리데이의 사망·행방불명자 추정 수치 250만 명은 상당히 과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인구증가율을 고려하여 사망, 행방불명자, 남으로 피난한 자 등의 숫자를 272만 8천 명으로 추정한 와다 하루키의 주장도 과장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Ⅵ. 한국전쟁(6 25전쟁)의 영향
3년 1개월간 계속된 한국전쟁은 쌍방에서 약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안으로는 민족분단을 더욱 확실히 하고 남북의 두 정권이 독재체제로 나아가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으며 밖으로는 동서의 냉전을 격화시키는 하나의 고비가 되었다. 또한 미국과 일본의 강화조약 및 미.일의 안전보장체제를 재촉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고 일본에게 전쟁경기를 가져다 주어 그 고도성장을 위한 기초를 이루게 했으며, 일본의 재군비를 재촉하는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
Ⅶ. 한국전쟁(6 25전쟁)의 결과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한국전쟁은 북한공산집단의 한반도 적화야욕에 의해 50년 6월 25일 새벽, 그들의 전면적인 침입으로 자유국가인 남한을 침략하였으나 미국과 UN등 우방의 도움으로 인민군을 몰아내고 신성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눈물나는 시나리오 였다. 하지만 수정주의적 입장의 한국전쟁은 그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고찰하여 다른 일면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나름대로 논리적이긴 하지만 추론적 성격이 강해 수정주의적 입장이 반드시 옳다고 볼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흑·백논리의 한계는 분명히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또다른 일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의심하게 한다. 미국은 과연 우리의 우방인가 정권욕에 사로잡힌 몇몇 소수에 의해 분단이 고착화 되고 한국전쟁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았는가 등에 문제이다. 앞에서 서술하였던바대로 한국전쟁은 냉전체계의 구도가 자리잡아가던 상황속에서 미소양강대국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인한 대리전쟁의 인상이 강하다는 것이고, 이 양강대국들을 등에 업고 각자의 기득권유지를 위해 그들과 결탁하여 반민족적 소수인물들이 겨레의 열망을 억누르고 분단을 고착화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내부의 불만적 요소를 해결하여 통일된 자주적인 진정한 해방을 위한 노력의 일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48년 양국에 정부가 들어서며 이 이후 전쟁과 반목을 거치며 분단의 길을 걸어왔던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힘없는 약소민족의 슬픔과 민족의 주체적 역량의 부족, 강대국의 이권개입으로 빚어진 결과이다. 미국의 영향력은 정치, 경제, 사회에 있어서 남한에 너무나 많은 흔적을 남겼다. 남북분단의 원인제공자인 그들의 전원의 모습을 보면서 푸근한 고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의 이권을 위해 힘을 행사했고 배신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을 원조하는 것은 그들이 이익이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정치사를 마음대로 휘둘러 지금 남북한의 모습을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자주적인 남북의 만남과 상호이해를 통한 우리민족의 가장 중요한 현실 당면 과제인 통일로 이어져 가는 길일 것이다.
Ⅷ. 결론
한국전쟁은 분단상황으로부터 연유하였다. 그런데 남북분단은 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해방 후 미·소를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수립의 실패에 기인되지만, 내적으로는 민족 내부의 이념대결과 지도자간의 분열에도 기인된 바 크다. 이는 5천년의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7천만 한민족의 자존심을 대외적으로 여지없이 실추시킨 중대한 치부를 노출시켰다.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힌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남북한에서 약 150만의 사상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산업시설과 건물·도로·교량 등이 거의 모두 파괴되어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피해는 이로 말미암아 민족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남북한의 대립이 고정되었다는 데 있었다. 전쟁 후 남북한 정부는 각기 경제재건을 통한 체제경쟁에 힘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독재체제가 성립되어 이제 통일은 더욱 어려운 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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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웅(1990) /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미국의 시각, 대구사학회
김철범(1995) / 한국전쟁과 미국, 평민사
박명림(1996) /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Ⅰ원인과 기원, 나남
심재기 / 6.25와 민족항쟁,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기념사업회
유지훈(1990) / 한국전쟁의 역사적배경, 한국도덕정치연구소
정하명 外(1987) / 한국전쟁사, 일신사
제임스 메트레이·구대열 역(1989) / 한반도의 분단과 미국, 서울 을유문화사
하영선(1990) / 한국전쟁의 새로운 접근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서, 나남
I.F.스토운·배외경 역 / 비사 한국전쟁, 신학문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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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8.2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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