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고구려사][고구려문화][고구려의 문화]고구려의 건국신화, 고구려의 성립,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의 지방행정, 고구려의 왕위세습, 고구려의 교육제도, 고구려의 결혼풍습, 고구려의 대외관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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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고구려사][고구려문화][고구려의 문화]고구려의 건국신화, 고구려의 성립,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의 지방행정, 고구려의 왕위세습, 고구려의 교육제도, 고구려의 결혼풍습, 고구려의 대외관계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고구려 성립과 멸망 과정

Ⅲ. 고구려의 건국신화

Ⅳ. 고구려의 지방 행정

Ⅴ. 고구려의 왕위 세습

Ⅵ. 고구려의 고분

Ⅶ. 고구려의 교육제도
1) 관학으로서 태학
2) 사학으로서 경당

Ⅷ. 고구려의 결혼 풍습

Ⅸ. 4세기 중반 고구려의 형세

Ⅹ.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

Ⅺ. 고구려의 대외관계 양상
1. 대중국관계
2. 대새외민족관계
3. 대백제․신라관계
4. 대외관계

Ⅻ.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 수당의 등장과 3국관계 등 크게 세기기로 나누고 있다. 반면에 노중국은 시기를 보다 세분하여 고구려의 남하와 백제·신라의 화호, 고구려·신라 대 백제·왜·가연연합의 대결,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적극화와 백제·신라의 동맹, 고구려·신라 대 백제의 대립과 신라의 한강하류 점령, 삼국의 상호항쟁과 대립, 고구려·백제연합 대 신라·당연합의 대결이라고 하는 6시기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4세기말~5세기초의 3국관계는 광개토왕비문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논급되었다.
수병전경책은 비문에 보이는 백잔신라구시속민이란 표현은 사신의 수식에 의한 허구로 파악되었지만 반면에 무전행남은 비문에 보이는 조공·속민·귀왕·노객 등의 표현을 정리하여 당시 고구려와 백제·신라와의 관계를 조공-속민관계와 ·귀왕-노객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5세기 후반에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으로 진일보하게 되었으며, 이 비를 중심으로 한 종합적인 연구특집이 나왔다. 이 특집호에서 이병희는 비문에 보이는 동이니 매금이니 하는 표현은 고구려인의 주체적인 존대사상으로 보면서 도리·대당주라는 직명과 작절이라는 이두를 통해 여나사이의 문화교류를 살폈다. 장수왕 37년의 평양천도는 대외적인 측면에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적극화의 표현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체결한 것이 주목되었다. 이 시기의 3국간의 항쟁과정에 대해 노중국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백제-신라-남송-북위로 연결되는 고구려 견제세력권형성을 기도한 것으로 보았다. 나제동맹의 결렬을 가져온 신라의 한강유역진출에 대해서는 종래 백제 성왕의 주도하에 백제·신라·가야연합군의 북진과 그 기회를 탄 진흥왕의 영토적 야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 것이 통상적이었으나 노태순은 고구려 자체의 내분과 신흥 돌궐의 남하 압력을 중시하면서 고구려가 돌궐의 압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남부전선의 안정을 도모하게 되고 그 방법의 하나로서 신라의 한강하류 지역 점령을 내약하는 일종의 여제동맹의 밀약이 체결되게 되었다고 보았다. 6세기말~7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에서는 수 및 당이 통일제국을 형성하게 되자 그와 병행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3국관계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시기 고구려의 외교정책에 대해 신채호는 정변에 의해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대중국강경노선과 대신라강경책을 추구하였다고 보았으며 이와 궤도를 같이하면서 노중국은 이 시기에 백제에서도 의자왕에 의한 정변으로 백제의 외교정책이 친고구려정책으로 바뀌면서 신라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였다고 보았다.
4.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는 한일연구자 사이에 뚜렷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본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세력의 한반도진출의 전제 위해서 한일관계사를 논하고 있는데 반면에 국내학자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에 의한 일본고대국가의 형성 및 선진문물의 일본에의 전수 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학자들의 임나경영설·소세계제국론과 국내학자들의 삼한삼국의 일본열도내의 분국설치론으로 대립되고 있다. 고대한일관계사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볼 때 문헌사료로는 일본서기와 송서왜전을 들 수가 있고 금석문자료로는 광개토대왕비문을 들 수 있다.
. 결론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동아시아의 오랜 문화권인 북방, 동방, 화북, 화남의 4대 문화권을 대표하는 국가들에 의해 세력 균형을 이룬 4강 중심의 질서였다. 그런데 6세기 말엽 화북과 화남 지역을 통일한 수의 등장으로 국제질서는 크게 변화한다. 3강 체제로 바뀐 국제질서는 쉽게 균형이 깨지면서 먼저 북방의 돌궐이 수, 당의 중화문명권에 굴복하고 만다. 이어서 70년간의 대결 끝에 동방의 고구려마저 중화문명권의 당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이로써 오직 한 나라, 즉 세계제국인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당나라는 결국 넘치는 힘을 서역으로도 내뿜어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일한 사라센제국과 대결까지 벌이는 중화문명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반면 동방 사회에서는 신라가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하게 되었으며, 왜는 고구려, 백제의 영향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통일된 국가를 이루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반면 고구려의 옛 땅은 고구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문명의 중심이 사라짐에 따라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당의 지배력은 요동 일대에 한정되었고, 신라는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고구려문명의 정수를 빼앗아 갔다. 고구려의 기술자, 예술인들은 당문명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음악은 당에서 연주되었으며, 고구려의 화가들은 당나라 사람들의 무덤에서 벽화를 그리게 되었다. 반면 고구려의 학문과 사상, 종교는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당나라에게 수치심을 주었던 고구려였던 만큼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다. 고구려의 각종 문명의 유산들은 전부 불태워져 버렸다. 안학궁성과 장안성 내성의 유적지를 보면 커다란 화재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고구려를 전하는 온갖 책들과 많은 유물들이 이 때 사라졌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처럼 동방에서 독자적인 세계질서를 형성하면서 독자 문명을 완성한 나라는 드물다. 고구려가 망한 이후로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문명사는 오로지 중국만의 역사, 중국문명만이 독주하는 가운데 유목민족들과 한족간의 치열한 싸움이 곁들어졌을 뿐, 고구려와 같이 높은 문화를 지닌 또 다른 강대국은 등장하지 못했다.
참고문헌
◎ 김용만 저(1998), 고구려의 발전-새로 쓰는 고구려 문명사, 바다출판사
◎ 박경철(1996), 고구려의 국가형성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이형구(1991), 한국 고대 문화의 기원, 까치
◎ 이도학, 삼국의 상호관계를 통해 본 고구려의 정체성
◎ 김용만(1999),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현암사
◎ 한국역사연구회, 고구려 왕조 700년사, 오상
◎ 김선풍 외(1996), 한국의 민속사상, 집문당
◎ 오순제지음(2004), 우리 고구려 찾아가기,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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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0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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