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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종교적 이해][교회][개신교의 정치사회적 태도][개신교의 부흥운동]개신교의 전래, 개신교의 종교적 이해, 개신교의 성향과 교회의 목표, 개신교의 정치사회적 태도, 개신교의 부흥운동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개신교의 전래

Ⅲ. 개신교의 종교적 이해
1. 계시종교론
2. 문명종교론

Ⅳ. 개신교의 성향과 교회의 목표

Ⅴ. 개신교의 정치사회적 태도
1. 시민사회의 변화와 기회영역의 변화
2. 사회적 목표의 변화, 교회목표 접합방식의 변환

Ⅵ. 개신교의 부흥운동
1. 1903년 원산기도회
2. 1906년 평양 장대현 교회 사경회
3. 1907년 부흥 사경회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 일어났다. 이 모습을 본 ‘존스톤’ 목사는 장차 조선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였다. 이후 교회 분위기와 지도자들의 동태를 보고 성령의 역사가 태동하고 있음을 느낀 길선주는 본 교회에서 동기사경회를 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회장 그래함(Graham Lee) 선교사를 방문하고 동기사경회를 개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집회를 위한 준비는 만전을 기했고, 신자들도 열정적으로 협력하여 평양시내는 부흥회라는 집회가 처음이었던 만큼 일반 사회에도 관심이 고조되었다. 드디어 수요일 저녁에 집회가 열렸다. 교회는 만원이었고, 은혜를 갈망하는 회중으로 장내의 분위기는 긴장되었다. 길선주 장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는 제목으로 설교 하자, 감동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기도가 우러나기 시작 했고, 회중의 기도는 저절로 통성기도로화 하였고, 찬송소리 또한 우렁찼으며, 기도에 응답하는 아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이 기간 중에 순경, 승려, 신부도 회개하고 큰은혜를 받았다.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서 한국 최초로 시작했던 새벽 기도회의 뜨거운 열정이 또한 대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대중적으로 매일 새벽기도회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고, 그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겼으며, 교회의 사정에 따라 집단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이것이 1906년 동기사경회 때 정식 집회로 개최되게 되었고, 그 이후 한국교회의 영속적인 집회가 되었다.
3. 1907년 부흥 사경회
1907년 1월 6일 마침내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연합한 대사경회가 열렸다. 이 사경회는 열흘동안 계속 되었는데, 낮에는 성경공부를 했고 밤에는 특별 전도집회를 가졌으며 선교사들은 정오에 기도회를 가졌다. 남자만도 매일 1,500명이나 모였기 때문에 자리가 없어 여자들은 밖에 자리를 만들 정도였다. 그래서 여신도들은 각교회에 분산해서 모이게 하였고, 남여중학교와 국민학교 학생들은 각 학교강당에서 모이게 하였다. 개회 첫날 2천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은혜롭게 진행되었으나, 처음부터 성령의 은사는 쏟아지지 않았고 , 며칠 평범한 집회가 계속되었다. 1월12일 블레어(William Blair) 선교사가 고전 2:27절을 본문으로 , “공동체 의식의 감화”란 주제로 설교하였고 13일 주일 저녁집회에 모두가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참석하였으나, 그 날 집회는 이상하리 만큼 잠잠했다. 마치 태풍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14일 월요일,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설 때 확실히 체감으로 거기서 신의 임재를 압도당하듯 느끼고 있었다. 그 날 비로써 부흥회가 무르익었다. 이길함(Graham Lee)선교사가 짧게 설교한 뒤 곧 통성기도를 할 것을 제의하였다. “통성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설움의 폭발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어 넘치는 영혼의 찬양의 물결 같았다”. 이때 이길함 선교사의 요리사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거짓행동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으며, 교회의 지도자급인 강씨와 김씨가 서로 화해하며 강씨가 김씨에게 당신을 미워했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 할 때, 온 회중에게 감명을 준 은혜로운 장면이었다. 집회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으나, 날이 몹시 추워 냉기가 스며들자 일단 폐회하고 교인들을 해산시켰다.선교사들은 화요일 정오 기도회에 모여 월요일밤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남은 일정에 더 큰 은혜를 내려 달라고 간곡하게 기도하였다. 그 날 저녁에 성령의 역사는 놀랍게 나타났다. 길선주 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하고 외쳤을 때 사람들의 마음 속에 큰 충격과 변화가 일어났다. 그 다음 주일 집회 때에는 성령의 역사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령의 역사를 전하게 되었으며, 그 소식은 멀리 퍼져나갔다. 그들은 회개의 눈물로서 끝낸 것이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은 그 손해를 배상함으로써 피차 화목을 이루게 되었으며, 각기 집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거나, 훔친 물건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갚아주었다. 그것은 비단 신자들에게 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그렇게 했으니 온 성안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러한 대부흥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 선교사들은 사람들이 감정에 흘러서 참되지 못한 동기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의심스럽게 여겼으나 얼마 안되어 사람들이 진정으로 죄를 통회 자복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 운동을 심각하게 관찰한 사람들은 이현실을 한국인의 비정상적인 심리적 기질이라고 보지않았다. 영국의 세실(William Cecil)경이 당시의 직접 본대로 적은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 결과는 어쨌든 한국에서 일어난 이 사태의 발전은 사람들의 깊은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이다. 더욱 이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의 사실이 웨슬레 대부흥운동에 실재하였던 성령강림과 유사함을 살펴보는 이들의 관심은 더욱 클 것이다. 웨슬레의 일기를 읽고 평양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기사를 비교하면 이 두 현상이 아주 같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 두 사건에는 이상한 권능이 나타났음을 볼 수 있고 신자들은 이성의 지배 이외의 다른 힘으로 자기의 죄를 이기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 힘을 믿게하여 주는 사실들이 있다.” 이와 같이 대부흥의 불길은 뜨겁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며 평양 전역에 확산하여 번져갔다.
참고문헌
◎ 강인철(1994), 한국개신교교회의 정치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 1945-1960,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 노치준(1998), 한국개신교사회학, 한울아카데미
◎ 박형민(1998), 초기 개신교 종교공동체의 성격과 사회적 실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 이근미(2001), 침묵을 깬 기독교 보수교단의 반공 궐기 움직임, 월간 조선, 9월호
◎ 이원규(2000), 한국기독교의 사회변동적 기능, 한국사회발전과 기독교의 역할, 한울
◎ 최종철(1994), 민중교회의 변화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경제와 사회, 겨울호
◎ 한미준(1999), 한국갤럽조사보고서, 한국개신교인의 교회활동 및 신앙의식조사보고서, 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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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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