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보고서 - 청계 평화시장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선정배경
2. 답사 장소 지도
3. 역사적 배경
4. 전태일거리의 조성
5. 답사 내용
6. 평화시장의 오늘
7. 감상
8. 답사사진
9. 참고문헌

본문내용

연 그 때 보다 나아졌는지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오늘날 평화시장의 본질을 보여주는 기사를 스크랩 해왔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창신동.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주택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드르륵, 드르륵’ 하는 미싱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겉에서 보기엔 평범한 주택건물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미싱이 돌아가는 소규모 봉제공장이다. 대부분 10평 미만의 공장에 3~4명이 미싱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 입구에는 ‘객공·하청 구함’ ‘미싱사·시다 구함’ 등과 같은 구인광고가 연락처와 함께 붙어있다.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에는 더이상 피복공장이 남아있지 않다. 공장은 대부분 동대문을 중심으로 근방 1.5㎞ 지역에 위치한 창신동, 신당동, 숭인동 일대 주택가로 들어갔다. 현재 창신동에서 숭인동에 걸쳐 있는 공장 수만 3000개 정도로 추산된다. ‘사단법인 동대문의류봉제협회’는 이 중 70% 이상이 5인 이하의 영세업체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근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만들어진 수입의류가 전체 의류시장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일감이 줄어들자 10인 이상의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은 정상 가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대규모 공장 대신 집에 미싱기계를 들여놓고 시다만 고용해 일감을 떼어다 작업하는 영세업체들이 늘고 있다.
일감이 안정적으로 들어오지 않다보니 일이 몰릴 때는 1970년대처럼 하루 14시간 이상씩도 일할 때가 있다. 협회에 따르면 수입품과의 가격경쟁으로 납품가가 5년 전 수준으로 하락해 현재 청바지 한 벌을 납품하고 받는 돈은 3000원 정도다. 1년 동안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된다고 할 때 현재 시다의 월급은 한 달에 110만원 내외, 미싱사의 경우 150만~180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감 부족으로 1년에 서너 달 정도는 공장이 멈추곤 한다.
최근 2~3년 전부터 이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중요한 변화는 하청과 객공(客工)의 증가다. 객공이란 업주가 미싱사에게 기계와 장소를 빌려주고 미싱사는 옷을 만드는 수량에 따라 공임을 받아가는 제도를 말한다. 전태일이 일하던 1966~1970년 당시 미싱사들은 업주에게 객공 방식으로 공임을 받아갔다. 옷을 더 많이 만들수록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미싱사들은 자신의 건강은 아랑곳않고 과도하게 업무에 매달렸다. 일이 많을 때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일이 아예 없을 때는 한 푼도 받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제도는 당시 청계천 노동자의 생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구조적 병폐로 꼽혔다. 결국 1976년 청계피복노조는 단체협약을 통해 객공 미싱사들이 일감이 없을 때도 기본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그런데 최근 일감이 줄어들면서 객공을 통해서라도 생계를 이어가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객공을 할 경우 업주와 미싱사의 분배비율은 보통 4:6이다.
기술자들의 노령화도 커다란 문제다. 현재 업계는 이곳에서 일하는 미싱사들의 평균 연령이 40세 이상인 것으로 추정한다. 시다에서 시작해 미싱사가 되기까지 보통 6년 정도 걸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약 10~15년 전부터 젊은 신규인력의 유입이 사실상 중단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동안은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다 시다로 써왔는데 당국의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인해 이마저도 어려워지고 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줄곧 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전업을 생각할 수도 없다. 창신동의 봉제공장에서 15년째 일하고 있는 김모(34)씨는 “젊었을 때는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대문 의류봉제협회’의 차경남 전무이사는 “국내 농산물 수입액이 5억달러 수준인데 반해 의류 수입액은 28억달러에 이른다”며 “이 같은 추세로 가면 앞으로 3년 내에 국내 의류제조업체의 70% 정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조업자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노동시간 준수와 같은 근로기준법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서울의류업노동조합’의 김정호 위원장은 “사장이 함께 일을 하며 2명, 3명을 고용하는 영세업체라 하더라도 임금을 체불하거나 떼어먹는 등의 근로기준법 위반사례가 발생하는 것을 좌시할 순 없다”며 “다만 시다 1명을 고용해서 집에서 일감을 떼어다 일하는 식의 가내수공업 같은 경우 근로기준법의 적용이 어렵다면 이에 대한 관련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곤 주간조선 기자(trueman@chosun.com)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일어난 지 3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곳에는 소리없는 생존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어려운 노동환경은 여전하고 봉제공장과 수입품에 밀려 경제적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다. 조금씩 나아져 가는 것처럼 보이던 근로조건은 최근들어 뒷걸음질 치고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또다른 전태일을 원하는가. 경제 논리에만 치우친 채로 노동자들은 또다시 뒷전으로 남겨두고 있다.
7. 감상
평화시장은 이곳에 삶의 터전을 두고 살아온 다양한 민중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특히 지난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희생과 분노와 투쟁과 절망과 희망이 있는 곳이다. 이들의 역사야 말로 살아 숨쉬는 건강한 역사로서 오늘의 우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미래로 달려가게 하는 원천인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였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요구는 독재정권의 개발 원리아래 무참히 짓밟힌 채 그들은 쓰러져 가야했다. 이번 답사를 통해서 지난 시대 노동자들이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헌신과 희생을 치렀으며 어떻게 투쟁해 왔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현대는 어떠한가. 전태일 열사가 부르짖었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요구가 아직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되살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열사의 정신을 화려한 기념거리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모든 민중들이 열사의 정신을 되새겨 보는 자세이다.
8. 답사사진
  • 가격1,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8.10.01
  • 저작시기2008.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215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