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투르크, 오스만제국] 오스만제국의 흥망성쇠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오스만투르크, 오스만제국] 오스만제국의 흥망성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오스만제국 개관

2. 오스만제국의 명칭문제

3. 오스만제국의 건국

4. 오스만제국의 발전

5. 오스만제국의 쇠퇴

6. 오스만제국의 조직과 제도

7. 종교조직과 밀라제도

8. 오스만제국의 술탄

9. 오스만제국의 개혁과 개혁운동

10. 터키의 민족주의

11. 참고자료

본문내용

그 때까지도 유럽 인을 열등한 인종 또는 기독교를 열등한 종교로 보고, 이 지역의 발전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두 세계의 접촉은 전쟁을 통해서나 유럽 국가의 외교관과 상인들이 일방적으로 오스만제국에 들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그 수가 급증하였고, 또 일부 오스만제국의 외교관과 상인들이 유럽 지역으로 진출하여 점차 그 곳 사정이 일부 지도층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유럽에 대한 인식이 일부층에만 제한되었고, 서민 대중에게는 생소하였다. 또, 유럽의 새로운 행정 기구, 세제, 교육 제도 등의 개혁에는 거의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의 당시 지도층은 유럽의 우월성은 과학 기술에 있다고 보았으나, 사회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즉, 오스만제국의 기정 사회 질서에 새로운 과학 기술만 도입하면 곧 유럽의 군사력에 버금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술탄은 셀림 3세로서, 그는 제국의 정부를 12부처의 내각으로 개편함으로써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는 관료 기구의 행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술탄이 개혁 조치를 통하여 유럽식 제복, 무기, 전술 등을 군대에 도입하자, 정예군인 예니체리가 1807년에 반란을 일으켜 결국 다음 해 술탄을 퇴위시켰다. 그 뒤를 이은 마흐무드2세도 역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조심성 있게 추진하였다. 그는 새로운 군 조직을 바탕으로 총독의 권한을 축소하여, 처형은 반드시 중앙 정부의 동의를 받아 시행하도록 하는 등 거의 200년간 자치를 누려 온 지방 정도 장악하였다. 그와 함께, 도로 및 우편 제도도 개혁하여 제국의 통신망도 개선하였다.
개혁운동
이 개혁 운동은 3단계로서, 제1단계는 기존 오스만제국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순히 구 관료 조직체가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참신한 인사를 등용하여 부정과 족벌주의를 제거하고, 지방의 호족을 중앙 정부에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존 군대 조직은 그대로 두고 유럽의 군대 조직에 따라 별개의 군 조직을 만들었다. 따라서, 두 개의 군조직은 서로 경쟁하게 되어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에도 반란과 외세의 침입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즉, 세르비아에서는 두 번이나(1804년과 1805년) 반란이 일어나 자치가 허용되었고, 그리스에서는 독립 전쟁(1821-1830)이 일어나 결국 달성되었다. 셀림3세가 시도하였고, 마흐무드2세가 시작한 개혁 운동은 1839년부터 탄지마트라 불렸는데, 광범위한 법률 제정이 포함되었으며, 이와 함께 개혁 운동은 제2단계(1826-1876)에 접어들었다.
첫째, 프랑스 정부조직을 모형으로 삼아 중앙 집권제를 강화하여 통치 영역 내의 모든 지역에, 또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 그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였다.
둘째, 법의 테두리 안에서 술탄의 신민은 인종, 종교 및 재능에 관계없이 각자의 생명, 재산의 보호와 인격의 존중의 받는다는 것이다.
셋째, 가장 긴요한 군 조직의 대폭적인 개혁이었으나, 종래 없었던 군 보급 부대를 창설하여 순수한 전투 부대에서 분리하였다.
넷째는 교육제도의 개혁이었다.
이러한 타지마트 운동은 마흐무드2세의 두 아들인 술탄 압둘 마지드(1839-1861)와 술탄 압둘 아지즈(1861-1876)의 통치 아래서 계속 추진되었다. 더구나, 이 탄지마트 운동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지식인은 유럽의 자유주의 문헌을 접하게 되었으며, 특히 정치, 역사, 철학 및 정부에 관한 서적이 보급되었다.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낭비벽이 심한 술탄 압둘 아지즈의 태도가 우유부단하자, 재상 미드핫 파샤를 비롯한 개혁파는 술탄을 퇴위시키고 압둘 하미드를 영립한 후, 벨지움과 프랑스 헌법을 바탕으로 하여 1876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양원제의 국회를 열었다. 이 때부터 오스만제국은 입헌 군주국이 된 것이다.
개혁 운동의 제3기(1876-1918)는 압둘 하미드의 술탄 즉위와 헌법 제정으로 시작되었다. 상원의원은 술탄에 의하여 임명되고, 하원의원은 국민의 직선이었다. 그러나, 미드핫 파샤와 그 추종자들의 개혁은 왕실 재정의 통제, 노예 무역 정지 및 무슬림과 기독교도의 공학제의 허용 등과 같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술탄과 보수 세력은 이에 반대하였다.
10. 터키의 민족주의
한편, 술탄은 자기의 억압 정책에 대한 원성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이슬람의 부흥을 통한 민족적 감정을 고취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할리파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범이슬람주의의 핵심 인물로 자처하여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이미 유럽의 자유 사상을 접한 젊은 지식층의 점증하는 불만을 해소시킬 수는 없었다.
또, 제국내의 소수 민족 특히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와 아르메니아인의 분리 독립 운동은 점차 폭력화하여 제국의 안정을 흔들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도의 민족주의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범터키 민족주의도 당시 러시아에 병합된 중앙 아시아의 망명 지도자를 축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었으나, 제국의 집권층은 민족주의를 이슬람에 어긋나는 인종주의보고, 이슬로람을 통한 무슬림의 단결과 제국 영토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오스만주의에 충성심을 바치고 있었다. 이들은 1905년 일본이 일.러 전쟁에서 승리하자 크게 자극받아, 1907년에 모든 반대 세력을 집결하는 새로운 정당, 즉 통일 발전 위원회를 결성하고, 1908년에 발칸 주둔군 부대의 지지를 받아 술탄에게 1876년의 헌정 회복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결국 술탄은 시간을 얻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굴복하여 통일 발전 위원회가 수락할 수 있는 내각을 임명하고, 해산된 옛 오스만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것이 곧 청년 터키당의 집권이다.
한편, 1908년에 불가리아가 독립하는 등의 오스만제국에 수치스러운 사건이 일어나자, 술탄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반동 세력이 일어났으나 군부가 혁명을 지지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와 함께, 오스만제국은 청년 터키당의 지배(1908-1918)아래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속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 당의 지배는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터키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1. 참고자료
이희철, 오스만제국과 터키사, 펴내기
  • 가격1,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8.10.23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716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