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에 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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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제 1장 조사 목적 개괄
제 2장 척화비란? 개념 설명

2. 본 문
제 1장 척화비가 세워진 시대적 배경
- 제 1절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흥선대원군은 누구인가
▷흥선대원군의 대내· 대외정책의 의의
- 제 2절 서양열강의 동아시아 침략
▷1866 병인양요
▷1871 신미양요
제 2장 척화비의 내용
- 제 1절 척화비의 외관
- 제 2절 비문 해석
- 제 3절 척화비의 존재 의의
제 3장 척화비에 대한 평가
- 제 1절 긍정적 관점
- 제 2절 부정적 관점
제 4장 척화비의 현대적 재해석 - 내가 대원군이었다면?

3. 맺음말
- 조사를 통해서 느낀 점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적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굳세게 싸울 것과 그들의 문호개방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병인양요에서 표출되었던 이러한 일단의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한층 더 강화되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것이 바로 척화비였다.
즉 척화비는 “주화를 배척하는 대원군의 의지를 담은 비석”이며 곧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을 극단으로 표현하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제 3장 척화비에 대한 평가
<제 1절> 긍정적 관점 - 자주적 문화 수호의 의식 고양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를 통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조선사회에 서양의 제반 모습을 나쁘게 인식시키는 영향을 주었다. 당시 척화비의 내용, 외세세력과 무역을 함은 곧 반역이다 등과 같이 서양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일반백성들이 그들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세력으로부터의 무력을 동반한 통상교역을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이를 표출한 척화비로 일반백성들의 단결을 이루어내어 막아내었고 때문에 조선의 문화가 외세세력의 문화에 흡수되어 서양화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사실상 당시 조선은 서양 열강과 통상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다, 구체적으로는 통상시 무리한 요구를 하는 등의, 특히 우리 유교질서가 경제적으로 흔들릴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는 힘없는 나라가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는 세상이었다. 강대국이 우리나라에 온 명분은 무역보다는 식민지를 늘리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 무역을 하고 싶었다면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를 일으키기 보다는 회담을 열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움으로써 외세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제 2절> 부정적 관점 - 조선사회의 근대화 지연
사회 전반적인 관점에서, 개항을 함으로써 기대되는 서양문물의 도입과 그에 따른 사회적 근대화가 상대적으로 늦어지게 되었다. 명치유신 등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비하여 척화비 등과 쇄국정책의 결과로 인한 폐쇄적인 자국경제는 군사력을 비롯한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민족의 비극을 야기하게 되었다.
조선의 고유문화를 지키려 했던 점은 좋지만 결과적으로 그만큼 근대화가 늦어졌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서양 오랑캐(洋夷)에 대한 두려움과 우리 고유의 문화, 유교 질서를 지키려는 대원군의 노력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시대사적 흐름으로 볼 때 문호개방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쇄국을 한다고 해서 문호를 개방 안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흥선대원군은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만약 더 일찍 문호를 개방하고 여러 나라와 교류를 활발히 했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발전된 선진국가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제 4장 척화비의 현대적 재해석 - 내가 대원군이었다면?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서원철폐나 안동 김씨 등 척족세도가의 제거, 정치 개혁 등에 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나 이러한 개혁들의 궁극목적이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존엄성 회복에 있었던 까닭에 결과적으로 전근대적인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즉 개혁적인 정치세력권을 형성하지 못한채 독단으로 개혁이 추진된 점은 그의 정치적 한계이다. 즉 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여 당쟁재연 등의 폐단을 일소하려 하였으나 그것은 기존의 신분질서에 반한 것은 아니었으며, 왕실의 회복을 위해 경복궁 중창전에 온 국력을 기울이고 호포제의 경우 양반의 체통을 생각하여 노비의 명의로 납부케 하라 한 그의 개혁은 기존질서를 회복하여 유지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정책이 근대적인 의미의 개혁이나 보수로의 회귀냐를 따지기 이전에 오랫동안 몇몇 양반 문벌세력의 통치에 농락되었던 국가기강과 억압되었던 국민들에게 일대 자극을 주었고, 안동 김씨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정권이었느냐 하는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어느 정도 일신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사실이다.
대원군의 집권기는 서양세력의 침탈이 심화되어 가던 때였으나 위정자나 일반 백성들은 아직까지 근대적 진보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과 경험이 없었다. 그것은 대원군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쓰러져가는 왕권을 바로잡아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것이었기에 그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의 대외정책에도 잘 나타나있다. 미국 등의 서양세력에 우호적인 면을 보이던 초기와는 달리,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그 후 집권말기까지 그는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서양세력에 대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입장을 보인다.
만약 내가 대원군이었다면 폐쇄적인 쇄국정책보다는 시대적 흐름이었던 서양과의 문호개방에 좀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서 서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우리나라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을 것이다. (조원 의견 일치)
3. 맺음말
① 척화비에 내포된 흥선대원군의 대내적대외적 정책
i) 대내 정책
→ 제도개혁 및 왕권강화 : 보수적인 수구책으로써 본질적인 한계점 존재.
→ 양이배척의 대민선전 : 척화비를 통한 서양배척의 국민정신 고양.
ii) 대외 정책
→ 천주교도 박해.
→ 강력한 통상거부 정책 : 전쟁을 불사한(병인양요, 신미양요) 쇄국의지.
② 흥선대원군의 정책이 당시 조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 구체제로의 회귀 측면이 강한 보수정책 추진
→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승리로 인한 일단의 서양열강에 대한 우위
→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 폐쇄적인 자국경제체제의 지속에 따른 상대적 근대화 지연
끝.
4. 참고문헌
▷ 이이화/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7 -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세계 열강 / 한길사 /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 창작과 비평사 /
▷ 강만길/ 고쳐 쓴 한국 현대사 / 창착과 비평사 /
▷ 창녕군청 (http://www.cng.go.kr)
▷ 네이버 백과사전 (http://www.naver.com)
▷ 다음 백과사전 (http://www.daum.net)
▷ 한국 관광공사 (http://www.knt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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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10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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