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경복궁
①근정전
②경회루
③광화문
④향원정
⑤자경전
⑥아미산 굴뚝
2.창덕궁
①인정문
②인정전
③낙선재
④관람정
⑤연경당
①근정전
②경회루
③광화문
④향원정
⑤자경전
⑥아미산 굴뚝
2.창덕궁
①인정문
②인정전
③낙선재
④관람정
⑤연경당
본문내용
체적으로 나비 381cm, 높이 236cm, 두께 65cm의 벽돌 구조물로, 표면의 가로 302cm, 세로 88cm의 직사각형 공간에 해 산 구름 돌 소나무 거북 사슴 불로초 학 등 십장생의 조형전(造形塼)을 배치하였다. 또 중앙에는 가로 44cm, 세로 29cm의 용문전(龍文塼)과 우측에는 가로 35cm, 세로 25.5cm의 학문전(鶴文塼)을, 양측 벽면에는 당초문(唐草紋)과 박쥐무늬를 배치하였다.
⑥아미산 굴뚝
1985년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지붕 제외)는 260cm, 한 면(모두 6면)의 폭 88cm이다. 이 굴뚝은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 석조물과 더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 조선시대의 구조물로서, 화강석 기단 위에 벽돌을 6각형으로 30~31단씩 쌓았으며, 상부는 창방 소로(접시받침) 굴도리 모양의 부재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6각의 각 면에는 사군자 십장생 卍자무늬 봉황 귀면(鬼面) 당초문(唐草文) 등으로 네 가지의 무늬를 구성하였다.
창덕궁
사적 제122호. 1963년 지정. 1405 년 (태종 5) 완공되었으 며, 면적 43만 4,877m2. 태종 (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 종 4) 한성 (漢城)의 향교 동(鄕校洞)에 이 궁(離宮) 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 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 다. 그 후 계속 인정전 (仁政 殿)선정전(宣政殿)소 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 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 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 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①인정문
보물 제813호.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건물, 5량가구(五樑架構)의 팔작지붕. 인정문은 이궁(離宮)인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면서 300년이나 조선의 정사를 다루어 온 인정전의 정문으로, 1649년(인조 27)에 효종이, 1659년(효종 10)에 현종이, 그리고 1724년(경종 4) 영조가 이 문에서 임금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곳이다.
②인정전
국보 제225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多包)집. 1804년(순조 4) 건립되었다.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기단(基壇)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상층기단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을 한 단 높여 돌리고 높은 주좌(柱座)의 초석(礎石)을 배열해서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는 원주(圓柱)이고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과 4개의 우고주(隅高柱)를 세워 중층가구법(重層架構法)을 따랐다. 두공(枓뱀)은 밖이 3출목(出目)이고 안이 4출목인 다출목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둥머리의 안초공(按草工)으로부터 살미와 첨차(墅遮)의 세부수법이 말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架構)는 외중층(外重層) 내통층(內通層) 수법이고 고주(高柱) 몸에 퇴량(退樑)을 끼워서 2층평주(二層平柱)를 받게 하였으며 우고주(隅高柱)가 2층 우주가 되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兩城)하여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이 근정전(勤政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③낙선재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 작(八作)기와지붕. 누마루가 깔려 있고, 모두 17칸 반의 규 모이다. 장대석(長臺石) 위에 초석(礎石)을 놓고, 네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기둥이며, 기둥 머리에 대들보를 걸었으 며, 익공(翼工)을 끼웠다. 누 마루 아래에는 아궁이를 내기 위하여 단을 높였고, 아궁이의 벽에는 작은 돌을 불규칙적으로 붙여놓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안허리의 굽음새도 적당하게 잡혔다. 또한 정면 6칸, 측면 2칸의 석복헌(錫福軒)과 이어져 있다. 원래 이곳은 상중(喪中)에 있는 왕후들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기거하던 곳이며,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상중에 왕후들이 기거하던 곳이라 하여 단청(丹靑)도 하지 않았다.
④관람정
선형(扇形)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으로, 건물의 일부 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며 6개의 원주(圓柱)를 세 우고 원주마다 주련(柱聯)을 달았으며 난간을 돌렸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추녀마루 6개가 각각 3개씩 모였으며 그 사이에 용마루를 설치하는 양식을 취하였 다. 건축적이기보다 공예적인 수법을 많이 구사한 정 자이다.
⑤연경당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팔작지붕집. 1828년(순조 28)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 모두 납도리집 형식이고, 장설(長舌)도 생략되어 있다. 정간(正間)은 넓고, 앞에는 좁은 툇간(退 間)이 놓여 있다. 문은 모두 2분합(二分 閤)이고, 대들보와 퇴량(退樑)의 높이는 모두 같으며 대들보 위에는 동자(童子)기 둥이 종량(宗樑)을 받았다. 창덕궁에 있는 다른 건물이 단청을 한 데에 비해 연경당 은 하지 않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남향(南向)하여 동서로 나란히 있어 딴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채로 된 집이다. 매우 단촐하고 아담하여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 형태를 잘 보여준다
⑥아미산 굴뚝
1985년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지붕 제외)는 260cm, 한 면(모두 6면)의 폭 88cm이다. 이 굴뚝은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 석조물과 더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 조선시대의 구조물로서, 화강석 기단 위에 벽돌을 6각형으로 30~31단씩 쌓았으며, 상부는 창방 소로(접시받침) 굴도리 모양의 부재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6각의 각 면에는 사군자 십장생 卍자무늬 봉황 귀면(鬼面) 당초문(唐草文) 등으로 네 가지의 무늬를 구성하였다.
창덕궁
사적 제122호. 1963년 지정. 1405 년 (태종 5) 완공되었으 며, 면적 43만 4,877m2. 태종 (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 종 4) 한성 (漢城)의 향교 동(鄕校洞)에 이 궁(離宮) 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 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 다. 그 후 계속 인정전 (仁政 殿)선정전(宣政殿)소 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 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 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 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①인정문
보물 제813호.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건물, 5량가구(五樑架構)의 팔작지붕. 인정문은 이궁(離宮)인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면서 300년이나 조선의 정사를 다루어 온 인정전의 정문으로, 1649년(인조 27)에 효종이, 1659년(효종 10)에 현종이, 그리고 1724년(경종 4) 영조가 이 문에서 임금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곳이다.
②인정전
국보 제225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多包)집. 1804년(순조 4) 건립되었다.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기단(基壇)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상층기단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을 한 단 높여 돌리고 높은 주좌(柱座)의 초석(礎石)을 배열해서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는 원주(圓柱)이고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과 4개의 우고주(隅高柱)를 세워 중층가구법(重層架構法)을 따랐다. 두공(枓뱀)은 밖이 3출목(出目)이고 안이 4출목인 다출목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둥머리의 안초공(按草工)으로부터 살미와 첨차(墅遮)의 세부수법이 말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架構)는 외중층(外重層) 내통층(內通層) 수법이고 고주(高柱) 몸에 퇴량(退樑)을 끼워서 2층평주(二層平柱)를 받게 하였으며 우고주(隅高柱)가 2층 우주가 되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兩城)하여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이 근정전(勤政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③낙선재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 작(八作)기와지붕. 누마루가 깔려 있고, 모두 17칸 반의 규 모이다. 장대석(長臺石) 위에 초석(礎石)을 놓고, 네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기둥이며, 기둥 머리에 대들보를 걸었으 며, 익공(翼工)을 끼웠다. 누 마루 아래에는 아궁이를 내기 위하여 단을 높였고, 아궁이의 벽에는 작은 돌을 불규칙적으로 붙여놓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안허리의 굽음새도 적당하게 잡혔다. 또한 정면 6칸, 측면 2칸의 석복헌(錫福軒)과 이어져 있다. 원래 이곳은 상중(喪中)에 있는 왕후들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기거하던 곳이며,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상중에 왕후들이 기거하던 곳이라 하여 단청(丹靑)도 하지 않았다.
④관람정
선형(扇形)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으로, 건물의 일부 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며 6개의 원주(圓柱)를 세 우고 원주마다 주련(柱聯)을 달았으며 난간을 돌렸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추녀마루 6개가 각각 3개씩 모였으며 그 사이에 용마루를 설치하는 양식을 취하였 다. 건축적이기보다 공예적인 수법을 많이 구사한 정 자이다.
⑤연경당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팔작지붕집. 1828년(순조 28)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 모두 납도리집 형식이고, 장설(長舌)도 생략되어 있다. 정간(正間)은 넓고, 앞에는 좁은 툇간(退 間)이 놓여 있다. 문은 모두 2분합(二分 閤)이고, 대들보와 퇴량(退樑)의 높이는 모두 같으며 대들보 위에는 동자(童子)기 둥이 종량(宗樑)을 받았다. 창덕궁에 있는 다른 건물이 단청을 한 데에 비해 연경당 은 하지 않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남향(南向)하여 동서로 나란히 있어 딴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채로 된 집이다. 매우 단촐하고 아담하여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 형태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