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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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제 1공화국
1. 이승만 정권의 성립에서 한국전쟁까지
2. 한국전쟁
3. 이승만 독재의 구축

Ⅱ. 제 2공화국
1.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2. 제 2공화국의 성립

Ⅲ. 제 3공화국
1. 5.16군사쿠데타와 제 3공화국의 성립
2. 제 3공화국의 외교정책과 경제성장
3. 박정희의 권력강화와 반대세력

Ⅳ. 제 4공화국
1. 유신체제의 성립
2. 독제체제 강화와 유신반대운동
3. 유신체제의 붕괴

Ⅴ. 제 5공화국
1. 신군부의 등장과 12.12군사반란
2. 서울의 봄과 제 5공화국의 출범
3. 5.18 광주민주화운동
4. 민주변혁운동과 6월 항쟁

본문내용

계엄사의 장군들ㅇ르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하극상을 일으킨 신군부는 13일 새벽부터 국방중추부와 방송, 신문, 통신사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요직에 이들이 자리잡고 5.18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2. 서울의 봄과 제 5공화국의 출범
긴급조치 9호의 해제와 복권조치로 재야인사와 정계인사들이 대거 석방, 복권되었다. 사회는 군부독재를 마치고 민주화의 열망에 휩싸였으며 각계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전국 대학들은 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주도 개헌 중단을 외치며 학교를 나와 15만명에 이르는 시위를 계속하였고, 노동운동도 노조결성과 민주화, 임금인상, 근로조건개선을 기치로 투쟁을 해나갔다. 정치권의 3김의 대권향배가 치열한 가운데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되었다. 신군부는 이제 군을 장악하고 정치 전면에 등장할 명분을 얻기 위해 시나리오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중정을 장악하고 언론을 장악하여 3김과 학생시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전두환의 미화에 힘쓰기 시작했다. 공화당과 신민당이 계엄해제를 위해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하자 신군부는 행동이 빨라지게 되었다. 이들은 소요를 조작하고 이를 계기로 전면에 등장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5월 17일 계엄확대, 정치활동 금지를 요구하며 국무총리와 대통령을 협박하였다.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따라 정치활동이 중지되고 대학이 휴교되었으며 정치인사들과 노동계, 학계 민주인사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그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설치되고 최규하의 사임과 개헌을 거쳐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3. 5.18 광주민주화운동
5월 17일 계엄령확대로 광주에 진주한 계엄군이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고 김대중의 체포가 이루어지자 광주 학생들과 시민들은 여기에 항거하여 5월 18일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날 오전 10시를 기해 공수부대 5천여명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살상하기 시작했다. 시민과 학생들은 연합하여 공수부대와 투석전 및 시가전을 벌이고 공수부대는 4개 대대로 증강되었다. 이후 시민들은 10만 여명 이상 결집하여 27일 계엄군에 의해 검거되기 까지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중 사망자는 192명에 부상자는 852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민주화운동은 언론에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않아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되었을 뿐이었다.
4. 민주변혁운동과 6월 항쟁
전두환정권의 비민주성이 극에 달하며 시민사회는 대거 투쟁에 나섰다. 정치계는 김영삼 단식을 필두로 재야세력의 연합을 통해 85년 국회의원선거에서 신민당이 제 1야당으로 부상하고 입당이 계속되면서 의석수 103석의 헌정사상 최대야당이 되었다. 양 김씨는 이를 토대로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며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학생운동도 새롭게 대두되었다. 82년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통해 반미운동이 태동하였는데 이후 고려대에서 전국학생총연합이 결성되고 4.19묘소 시위와 미문화원농성사건이 일어나면서 반미는 학생운동의 중심구호가 되었다. 또한 이들ㅇ느 노학연대투쟁에 힘썼는데 특히 위장취업이 노동계 전반에 퍼지면서 투쟁을 확산시켰다. 노동계는 각계와 연대하여 노조운동을 가열하고 인권과 생존권 보장을 위해 투쟁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개헌 운동을 막고 학생들을 대거 검거(애학투사건)하는 등의 진압을 계속하였다. 이런 중에 양 김씨는 신민당을 탈당 신당을 창당하고 재야세력과 정당이 연합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여 대거 국민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었다. 이 때 부천경찰서의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은폐되었던 것이 밝혀지면서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87년 6월 10일 민정당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자 ‘박종철군 고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 규탄대회’를 시작으로 6월 항쟁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시위가 일파만파로 퍼지자 전두환 정권은 19일 군 동원을 통한 비상조치를 시행하고 각지에 군대를 배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 CIA의 첩보활동과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 전달로 비상조치는 저지되었고 결국 6.29선언에 이르게 되었다. 6월 26일 평화대행진에는 각지에서 180만이 넘는 인원이 길거리로 나왔으며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민주사회를 위한 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국민들의 승리를 이룩하게 되었다.

키워드

한국,   현대사,   개관,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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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19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0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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