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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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아시아 역사와 영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들어가며 --------------------------- 1

II. 동아시아 근현대사와 영화 -------------- 1

1. 중국 근현대사와 영화 - 역사적 상황을 다룬 영화를 중심으로 ----- 1
2. 1960년대 일본 역사와 영화 - ‘오시마 나기사’ 감독을 중심으로 ---- 4
3. 1950-60년대 한국, 신상옥 영화의 근대적 측면을 중심으로 ------ 7

III. 마치며 --------------------------- 10

※ 참고문헌 --------------------------------------------- 10

본문내용

단위의 경제계획.
이 실행될 당시, 빈곤에 시달려 왔던 당대의 계몽적 사업에 대한 열망과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지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굴 뚫기 작업은 5년이라는 계획 아래 추진되는데, 이것은 경제개발 계획의 단위가 5년 단위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 영화는 상이군인인 용이가 고향에 돌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마을을 위해 황무지를 옥토로 바꿀 수 있는 굴 뚫기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을 다룬다. 이 굴 뚫기 프로젝트는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빈곤과 결핍의 전근대적 농촌 사회를 풍요와 번영의 근대적 농촌 사회로 이행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근대화 프로젝트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 속에서 굴 뚫기 프로젝트는 그 당시 60년대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용이의 굴 뚫기 작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용이의 외삼촌, 송의원, 근배의 장모, 마을의 노인들 등 대부분 장년 혹은 노년층이다.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근대화의 지지 세력이 청년층인 반면 그 반대 세력은 주로 노년층이라는 점은 이 영화가 세대 대립을 통해서 근대를 지지한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당시 ‘자주적 근대화’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른바 ‘한국식 민주주의’로 요약되는 곡해된 정치적 근대화이다. 영화 속에서 정권은 두 번 교체된다. 처음의 정부는 이승만 정부였는데, 4.19 혁명에 의해 새로운 정권으로 교체가 되었다가 다시 군사 ‘혁명’에 의해 또 다른 정권으로 교체된다. 여기서 이승만 정권을 대표하는 도청 과장은 용이가 추진하는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해 협조할 의사가 전혀 없으며, ‘민주주의’ 선거를 의식하여 ‘중립’을 강조하는 부패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4.19 혁명으로 들어선 새로운 정권은 용이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비춰지지만 정작 그가 관의 원조를 요청했을 때, 용이가 대하게 되는 것은 관료들의 행정 편의주의와 책임 전가뿐이다. 송낙원 외(2004),<동아시아 영화:작가,사회,미학>, 한양대학교 출판부, pp.201-pp.203
4.19 혁명 정부조차 조국 근대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제시되는 반면, 새롭게 등장한 군사 정부는 전혀 다르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세운 정권’은 용이의 굴 뚫기 사업에 화약을 지원함으로써 그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 따라서 국가 재건과 경제 부흥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제대로 수행해 낼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은 군부 정권으로 부각된다. 이것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박정희 군부 정권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상옥의 <쌀>은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이 내세운 자주적 근대화 프로젝트에 전적으로 영합하는 국책계몽영화임이 드러난다.
□ 전후(戰後) 한국 사회와 신상옥 감독
1950-60년대의 한국 사회와 역사의 큰 흐름은, 전후의 혼란 속에서 질서 재편의 힘들이 충돌하던 역동적인 장이었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불안정했다. 50년대와 60년대 동안 신상옥이 연출한 영화는 40편이 넘었다. 멜로드라마, 계몽영화, 공포물, 액션물 등 장르 또한 다양했다. 그는 그 영화들을 통해 때로는 근대화의 계몽 프로젝트(군사정권의 지지자)에 영합했고, 때로는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매혹과 거부의 극단적 태도를 표출했다. 그가 영화에서 그리고자 한, 불안정과 동요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그 시대에 대한 반영의 결과물로 받아들여야 할 것 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상옥의 영화가 ‘한국 60년대의 증후’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어떠한 형태로든 요동치는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불균질적인 형태로나마 한국 근대의 미학을 영상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III. 마치며
동아시아 3국은 역사적으로 근대화와 경제 발전, 이념의 충돌이 가장 급격하게 일어난 ‘역사 투쟁의 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 입장에서 매우 굴욕적이었을 ‘아편전쟁’으로 인한 홍콩의 영토 할양사건, 이념권력민중의 총체적 투쟁이었던 ‘문화대혁명’ 등은 앞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성찰적 반성이 필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일본 오시마 감독의 여러 작품들에서는, 혼돈으로 가득 찬 60년대의 시대적 모순을 느낄 수 있었고, 이를 바라보는 감독의 자조적인 관점에 조금은 동의할 수 있었다. 미일안보투쟁 등의 현장에서 패배하고 이를 ‘작은 저항’으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감독의 시선이 현 세대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상옥 감독 작품의 경우, 군사정권에 영합한 예술가라는 인식이 끝끝내 사라지지 않았지만 - 한국 전쟁 이후 폭발하듯 휘청거렸던 ‘역사에 대한 기록물’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동아시아 3국인 한국, 중국, 일본은 정세적역사적으로 그 관계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3국의 근현대사를 두루 살피며 ‘역사와 영화’에 중심을 두고, 해당 시대의 작품을 살펴보며 자료를 찾아보는 일은 그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로 또 같이’라는 말처럼, 각 국의 역사는 따로인 듯 같은 물줄기를 타고 있다. ‘역사’라는 큰 흐름 속에서 ‘영화’가 어떻게 시대상을 반영했는지, 어떻게 역사에 ‘동조(영합)’했는지, 어떻게 ‘저항’했는지의 측면은 감독 개인의 성향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 참고 문헌
송낙원 외(2004),<동아시아 영화:작가,사회,미학>, 한양대학교 출판부.
한국 중국현대 문학학회(2006),<영화로 읽는 중국>,동녘.
나병철(1995),<근대성과 근대문학: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문예출판사.
아서 놀레티(2001),<일본영화 다시보기:작가주의,장르,역사>, 시공사.
임정택, 이효인(2007),<동아시아 영화의 근대성과 탈식민성>, 연세대학교 출판부.
정종화(2008),<한국영화사:한권으로 읽는 영화100년>,한국영상자료원.
※ 인터넷 자료
한국영상자료원 운영, 한국 영화 데이터 베이스 : www.kmdb.or.kr
씨네 21 : 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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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29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10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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