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역관 홍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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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역관(譯官)

인연의 시작

종계변무(宗系辨誣), 회생의 희망

종계변무의 해결, 우연이 낳은 기연

홍순언에 대한 견제

임진왜란(선조25년, 1592)

홍순언에 대해 마치며...

<참고자료>

<추가자료>

본문내용

연간에 상역(象譯:통역)의 반전(盤纏:여비)조로 삼사(三使) 이하 매인(每人)에게 인삼 80근을 가지고 가는 것을 허가하였는데, 이것을 팔포(八包)라고 하였음. 뒤에는 백금과 잡물을 대신 가져가게 하였음
와 불우비은(不虞備銀)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지금 서울과 지방의 은화(銀貨)가 탕갈된 것은 오로지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이 가지고 들어가는 데 연유된 것입니다. 전일에는 황력재자관(皇曆齎咨官) 중국으로 황력(皇曆)을 가지러 가는 임시 벼슬
의 사행이 가지고 들어가는 은(銀)이 거의 15만 냥에 이르렀으므로 감사(監司) 한지(韓社)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팔포(八包)의 법(法)을 엄중히 지켰기 때문에 그 수량이 매우 적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사행이 아무 탈없이 돌아왔습니다. 임인년 이후에는 새로 법식(法式)을 정하여 1천여 냥을 지급했는데도 그 사행이 또한 조금도 구애가 없었습니다. 이 뒤로는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사사로이 역관(譯官)에게 은을 대여(貸與)하거나 혹 무역(貿易)을 핑계하고 지나치게 지급하는 경우에는 엄격히 금단(禁斷)하여 이를 범한 사람은 비록 대관(大官)일지라도 무거운 책벌을 가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영조 3년(1727), 10월 24일
중경지에 “청나라의 아편중독자들은 인삼을 약으로 삼는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만병통치약으로 쓰였으며, 승정원일기 영조3년 5월조에 “일본 풍속에 모든 병에 인삼의 약효를 보았기 때문에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사려고 싸운다.”라는 구절에서 그 효능을 짐작할 수 있다.
비변사등록 영조 14년 7월조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인삼의 10분의 8~9가 일본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삼은 중국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음으로 양으로 수출이 활발해져 국내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기도 했다. 숙종8년(1682) 호조판서 윤계는 “인삼이 비록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만 상고(商賈) 상인
들이 북경과 동래로 옮겨다가 팔기 때문에 여염간에 약용으로 쓸것마저 없어졌으니 남북 두 군데 중 한 군데는 마땅히 판매를 못하게 막아야합니다.”라고 건의할 정도였다. 이덕일 지음, 조선 최대 갑부 역관, 김영사, 2006 p104 중 인용
의주에 머물다. 또 부윤과 함께 진번헌에서 짐짝을 받아들이다. 방란군관(防亂軍官)에게 분부하여, 만일 쇄마구인(刷馬驅人) 중국에 사신이 갈 때에 방물(方物), 자문(咨文)을 말에 싣고 가는 사람으로 민간에서 징용하였다.
의 반전은(盤纏銀) 여비(旅費)로 쓸 은자(銀子)
을 마련하여 각각 차하(上下) 들이는 것을 차[上]라 하고, 내는 것을 하(下)라 한다. 즉 출납(出納)과 같은 말이다.
한 후에 혹 저들의 술과 음식을 값없이 먹여 저들로 하여금 발괄(白活) 관아에 대하여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호소하는 것이다
하거나 혹 불우비은(不虞備銀)을 꾸어 달라 하면 결탄코 한사엄곤(限死嚴棍) 죽음에 이르도록 엄히 치는 곤장이다. 즉 죽도록 곤장 친다는 말이다.
하리라 분부하니, 방란군관은 북경길에 하인(下人)의 노자를 내어 주는 소임이요, 불우비은 감병영(監兵營)과 의주에서 혹 헤아리지 못한 일을 당하면 쓰라 하고 별도로 명색(名色)을 정하여 둔 은(銀)으로, 해마다 사행이 가져가는 전례라. 한국고전번역원,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1권, 무오년(1798, 정조 22) 11월
무오연행록-조선 후기에 서유문(徐有聞)이 지은 연행록. 한글필사본. 1798년(정조 22) 10월 삼절연공 겸 사은사(三節年貢 兼 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연행(燕行)하고, 다음해 4월 초2일 복명(復命)하기까지 왕복 160여일을 일기로 쓴 기행문이다.
초기에는 팔포제로 역관은 인삼이라는 기본자금을 가질 수 있었고, 당시 호평을 받던 인삼을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다. 인삼의 가치가 높고 수요가 많을수록 역관의 이익은 컸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불우비은이라하여 관청에 필요한 물품구입의 자금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관청의 물품은 팔포무역외로 포함되어 별포무역이라 불리며, 역관들이 거기에 이득을 덧붙여 부를 축척한 것으로 보인다.
부연 사행(赴燕使行) 중국 북경(北京)으로 떠나는 사신 행차. 북경의 옛 이름은 연경(燕京)이었음
(사행로 : 의주에서 산해관까지) 사진은 19세기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 중 부분
조선 후기 청나라에 보낸 조선 사신의 총칭.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을 조천사(朝天使)라 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의 도읍인 연경(燕京, 北京)에 간 사신이란 의미로 연행사라 했다.
사신의 종류는 정기사(定期使) 매년 정기적으로 파견되는 사신
와 임시사(臨時使)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만 파견 되는 사신
가 있었으며, 정기사는 정조사(正朝使) 매년 정월 초하룻날 신년 새해를 축하하러 가는 사신
, 성절사(聖節使) 중국의 황제, 황후의 생일에 축하하러 가는 사신
, 천추사(千秋使) 중국의 황태자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는 사신
, 동지사(冬至使) 매년 동지 전후하여 중국에 가던 사신
가 있으며 임시사에는 사은사(謝恩使) 중국에서 우리의 왕실이나 국가에 대하여 호의를 베풀었을 때 사례하기 위해 보낸 사신
, 진하사(進賀使) 중국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
, 주청사(奏請使) 국사에 대하여 중국 황제에게 주청 할 일이 있을 때 파견 되는 사신
, 진주사(陳奏使) 국사를 중국 황제에게 통고할 일이 생겼을 때 파견
, 변무사(辯誣使) 중국이 국사에 대하여 곡해하는 일이 있을 때 이를 정정 또는 해명하기 위하여 파견
, 진위사(陳慰使) 중국 황실에 국상이 났을때 향과 제문을 가지고 파견
가 있다.
사행의 임무는 매우 복잡하였다. 모든 사행은 반드시 표문(表文 : 왕복 외교문서)이나 자문(咨文 : 일정한 청원을 담아 올리는 글) 등 사대문서(事大文書)와 조공품(朝貢品)을 가지고 가서 조공(朝貢)과 회사(回謝) 형태로 이루어지는 연행무역(燕行貿易)을 행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행사(燕行使)’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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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2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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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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