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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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교회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로마교회 발아기 (590-800)
 1. 서론

2. 로마교회 발아기의 특성
1.역사의 중심의 동방에서 서방으로 이동함
2.기독교적 생활의 활성화
3.여러 차례의 종교적 부흥이 있음
4.시대 구분

3. 그레고리우스 1세

4. 이슬람교의 발흥

5. 서유럽 전도

6. 이 시대의 교리와 신학.

본문내용

헬라어, 히브리어 3가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종래의 의결 내용이 거부되고 '어떤 언어로도 기도 드릴 수 있다는 새 규례가 확정되었다.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이며 당시 아퀴타인(Acuitaine)의 왕이었던 루이(Louis, 814-840)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롤링거(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후에 성경 주석으로 유명해진 스페인의 학자 클라우디우스(Claudius)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황제가 되자 클라우디우스를 튜린(Turin)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덕스러운 인품을 가지고 있었던 이 새 감독은 프랑크푸르트회의에서 결정된 성상 반대의 원칙을 철저히 집행해 나갔다. 그는 튜린의 여러 교회에서 자신이 우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성상과 십자가 등을 예외없이 제거함으로 인해 그 회의의 결정 사항을 넘어서서까지 철저히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튜린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의 조치에 찬성했으므로 별 저항을 받지 않았다. 또한 클라우디우스는 공공연하게 베드로의 지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으며 베드로로부터 로마 감독(교황)에게 넘겨졌다고 하는 소위 '열쇠의 능력'이라는 것도 교황 한 사람이 아니라 감독 제도 자체에 넘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로마 감독은 오직 사도적 생활을 할 때만이 사도적 능력과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이슬람교도들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잔인한 칼의 위력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많은 신자들과 교회가 이때 희생되었고, 이방 로마 제국이 박해를 가하는 동안 고난을 견디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전통을 가지고 있던 북아프리카에서는 인구의 상당수가 이슬람교도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죽어갔다. 참으로 이슬람교는 이방인이든 그리스도교인들이든 우상 숭배를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4) 바울파의 행적과 가르침 및 평가
성상 파괴 운동 덕분에 박해받던 소아시아 지역의 형제들이 다소간 평안을 얻을 수 있었으나 왕후 데오도라의 치하에서 다시금 성상 옹호자들이 승리하자(842년) 그들은 '성상을 끈질기게 반대하며 우상적이고 미신적인 모든 종류의 예배를 반대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자기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며 심지어 자신들 모두를 스스로 제사장이라고 하는 이단들' 곧 바울파로 불리는 형제들을 근절시키기로 결정했다.
형제들은 셈바트(Sembat)와 같은 유능한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을 통해 다가오는 시련의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 셈바트는 8세기 말경 아르메니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카톨릭은 그를 바울파의 창시자라고 지목했을 정도로 그는 뛰어난 하나님의 일군이었다.
또 다른 지도자로 세르기우스(Sergius)가 있었다. 그는 34년(800-834)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발이 닳도록 동서남북을 뛰어다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도들을 돌아보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고 강력한 영향력으로 분열을 치유하며 성도들을 연합시키며 가르쳤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였으며 늘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그릇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했다. 그는 믿음을 가진 한 여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참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본래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이 읽으며 평신도는 읽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그 여인으로부터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는 것을 막는 것은 사제들과 마귀의 속임수'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그는 직접 성경을 읽고 믿었으며, 오랫동안 매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의 편지들은 널리 읽혀졌고 그의 활동은 그를 쫓던 자들에 의하여 도끼로 죽음을 당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탁월한 영적 능력과 헌신적인 봉사로 인하여 여러 믿음의 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콘스탄틴, 시므온, 게네시오스, 요셉, 사가랴 , 바네스, 셈바트, 세르기우스, 이들은 연이은 박해로 인한 파멸을 죽음으로 극복하고 그 이름을 보존한 사람들이다. 이런 형제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고, 신약 성경의 전통을 바꾸지 않고 지속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종종 성경으로부터 사람과 교회 이름을 취하여 사용했다. 즉 콘스탄틴은 실라로, 시므온은 디도로, 게네시오스는 디모데로, 요셉은 에바브로디도로 불리웠다. 이와 달리 대적자들이 붙인 이름도 있다. 예를 들어 사가랴는 돈만 아는 목자, 바네스는 더러운 사람이라고 불렸다.
이 사람들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그들의 신앙과 삶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비잔틴제국은 대체로 바울파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을 도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 내에 강경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상 숭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은 그들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때로 형제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심지어 강력한 성상 숭배 반대자요 아르메니아 출신이여 형제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던 레오 3세와 같은 왕조차도 희랍 교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바울파에 대한 공격을 허락함으로써 형제들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시기에 일어난 데오도라 왕후의 박해 때 형제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시기에는 왕후의 명령에 의해 교수형과 화형, 수장형 같은 조직적인 살육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842-867년 사이에 데오도라와 재판관들의 열렬한 박해로 인해 형제들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박해도 형제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형제들은 데오도라 치하의 박해와 그 뒤에 일어난 싸움으로 인해 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0세기 경에는 바울파에 대한 태도가 조금 관대해졌다. 그 동안 형제들은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지역으로 주로 옮겨갔으며 유럽에서도 상당히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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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9.03.05
  • 저작시기2009.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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