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 혁명사 요약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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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 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것, 즉 자주화(自主化)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위정자(爲政者)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계층의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과 개화 지식인들의 개화(開化)운동이 그런 맥락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은 반대했다.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간과하고 침략세력과 결탁했다.
이런 한계 등으로 결국 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고, 그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세상을 향한 농민 대중의 일대 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 1894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다가 30∼40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끝났다. 그런데 이 사건의 전개과정은 우연히도 우리의 한 해 농사와 꼭 닮았다. 농민혁명의 씨앗이 부려진 동학공인운동 기간은 해빙에, 고부농민봉기는 봄의 파종에, 3월 봉기는 여름의 경작에, 집강소 설치 및 재봉기 단행은 가을의 결실에, 그리고 9월의 재봉기의 좌절은 농부가 떠난 겨울의 황량한, 그러나 새로운 농사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는 들판에 견주어 봄직한 것이다.
농민혁명과정에서 농민군은 전(前)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행해 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농민군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지주 중심의 구조를 혁파하고)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王政)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인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 = 자주 근대화(반봉건 반외세)'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일대 항쟁이었으며, 우리 근대사의 성패(成敗)를 가르는 사건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의 대항쟁은 불행하게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의병전쟁·3.1 만세운동·상해임시정부·고아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이념적 수원지였다. 18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해주 농민군의 선봉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인 밀정 살해, 신민회(新民會) 및 상해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걸은 백범 김구의 생애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 동학농민혁명/ 3.1만세운동/멸왜운동 기념비 ]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여러 민주화운동 즉 4.19의거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리룬다. 그런 점에서 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산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 있다.
역사에서 '만일'이라는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일이다. 역사의 대상인 과거는 말 그대로 이미 지나 버려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정'을 한번 세워보자. 만일 농민군의 호소에 호응하여 민족 구성원(관료와 지주, 양반과 향리층 등) 모두가 농민군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면 어떠 했을까? 정말 그랬어도 우리는 일제의 침략에 그처럼 무기력하게 허물어지고, 식민지 백성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결과야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온 민족이 나서서 저항했다면, 그 성패에 관계없이, 우리 근대사는 분명 그에 걸맞게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식민지화에서부터 파생된 현대사의 온갖 불행 역시 모습을 달리했을 것이다.
상상으로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아쉬움을 던지며 다가오지 않는가?
1) 농민들은 폐정개혁안에서 경제적인 수탈을 금하여 소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세제를 개혁과 수령들의 불법적인 수탈행위 방지 문제는 이미 실학자로부터 지적된 부분이었다. 그리고 개항이후 외국 상인에 의하여 피해를 입고있는 소상인의 생존권 보장에 관한 사항이었다.
2) 농민들의 사회적 지향은 신분제의 철폐와 같은 평등한 인간관계의 실현에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당시 지방 유림들의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3) 농민들의 정치적 지향은 반봉건, 반외세 의식에 있었다. 그러나 국왕에 대한 태도는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국왕이 보낸 관리를 처형함으로써 점차 적대화 되었다. 그러나 왕정을 청산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합의정치라고 표현 된 대의제를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외세에 관해서는 일본의 내정간섭에 대해 철저한 항일투쟁에 나섰다.
4) 동학농민혁명의 결과는
이 사건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종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있어 일본이 그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개혁요구는 갑오개혁을 불러와 근대적인 개혁이 추진되었다.
농민군과 개화파 정권, 민씨정권, 보수유생층, 일본군과의 적대관계가 형성되었다.
농민층과 보수 유생층의 적대관계로 인하여 농촌공동체가 파괴되었다.
각 군현에서는 양반지배층이 농민군에 대한 잔학한 복수와 핍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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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08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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