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백제의 무령왕릉
1. 무령왕릉
2. 무령왕 - 백제의 25대 왕
Ⅱ. 신라의 흥덕왕릉
1. 흥덕왕릉
2. 흥덕왕 - 신라 제42대 왕(재위 826˜836)
Ⅲ. 고구려의 왕릉
Ⅳ. 고려의 왕릉
1. 고려 태조 현릉(太祖 顯陵)
2. 공민왕릉(恭愍王陵)
참고문헌
1. 무령왕릉
2. 무령왕 - 백제의 25대 왕
Ⅱ. 신라의 흥덕왕릉
1. 흥덕왕릉
2. 흥덕왕 - 신라 제42대 왕(재위 826˜836)
Ⅲ. 고구려의 왕릉
Ⅳ. 고려의 왕릉
1. 고려 태조 현릉(太祖 顯陵)
2. 공민왕릉(恭愍王陵)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일부분만을 따서 기록했던 것이다. 아마 이것은 『구삼국사』를 편찬한 신라인들의 무성의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무성의한 편찬작업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고구려 28왕의 묘호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잘못 전달된 묘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또 후대에도 그 묘호를 그대로 물려주어야만 하는 불행한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능이 조성된 곳의 지명을 알았다는 것은 능을 찾아낼 수 있는 단초를 얻은 것이므로 그저 안타까워하고 있을 일만은 아닌 듯하다.
Ⅳ. 고려의 왕릉
1. 고려 태조 현릉(太祖 顯陵)
○ 연대 : 943년
○ 위치 :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현릉은 만수산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이다. 이 무덤에는 그의 내자(신혜왕후)도 함께 묻혔다고 전한다. 무덤무지 둘레에는 12각으로 병풍돌을 돌렸으며 그 밖으로는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무덤의 무덤 구역은 외래침략자들의 파괴와 파괴와 도굴로 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적지 않게 잃었다. 지금 무덤 앞에는 망주석 한 쌍, 상돌 한 개 문인상 한쌍, 돌짐승 두쌍, 돌등 한 개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정자각은 지난 전쟁시기에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54년에 다시 옛 모습대로 복구해 놓은 것이다.
무덤구역 석조물들의 돌다루기 솜씨와 조각 솜씨는 비교적 괜찮은데 특히 이 무덤 상돌의 받침돌 정면에 새긴 꽃무늬와 새무늬 조각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고려는 여러차례 외래 침략자들의 침략을 당하여 시조왕인 태조의 시신을 안전한 곳에 옮겨 묻었다가 가져오곤 하였으므로 현릉은 여러번 보수를 거치게 되었다.
지금의 일부 무덤시설 가운데서 고려 후기 양식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기인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무덤 건축 당시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초기의 대표적인 돌칸 흙무덤인 태조 현릉은 고려 묘제 연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2. 공민왕릉(恭愍王陵)
○ 연대: 13651374년
○ 위치: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2기의 무덤을 동서로 나란히 세워 쌍릉형식으로 만든 이 무덤은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 현릉(서쪽 것)과 왕비(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으로 이루어졌다. 공민왕은 왕비가 죽자 자신이 직접 주관하여 오랜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공사를 벌였다. 무덤구역은 3개의 층단과 아래의 경사단으로 이루어졌다.
맨 윗단의 크기는 동서 약 40m,남북 약 24m인데 그 한가운데에 2기의 무덤을 남향으로 나란히 놓았다. 무덤은 돌칸 흙무덤이다. 무덤무지의 높이는 약 6.5m이고 병풍돌의 대각 직경은 13.7m, 두 무덤무지 사이의 간격은 0.5m이다. 각 무덤무지의 둘레에는 12각으로 병풍돌을 돌리고 그 밖으로 난간을 둘렀는데 병풍돌에는 구름을 탄 12지산과 연꽃무늬를 섬세하게 새겼다. 이밖에 맨 윗단에는 한 쌍의 상돌과 범과 양 조각들 그리고 한쌍의 망주석이 있다. 두 번째 단에는 두 쌍의 문인상과 한 쌍의 돌등이 있고 세 번째 단에는 두 쌍의 무인상이 있다. 경사단의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으며 능의 원찰인 광통보제선사의 탑과 비가 있다.
이 정자각은 전에 없어져 터만 있던 것을 최근에 새로 복구한 것이다. 무덤칸은 무덤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이다. 안칸의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석 판돌을 한면에 하나씩 세워 만들었으며 천정은 3개의 판돌을 덮어서 평천정을 하였다. 동, 서, 북 세 벽면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12지신상 벽화가 각각 4상씩 배치되어 있다. 12지신상은 구름을 타고 손에 홀을 쥐었으며 머리에 관을 쓴 인물로 형상화하였다. 관 위에는 각기 자기 방위에 해당하는 동물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천정에는 하늘을 상징한 해와 북두칠성, 그리고 한 쌍의 3성을 그렸다.
안칸의 동벽에는 높이 43cm, 너비 38cm의 문을 새기고 그 밑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함을 나타냈다. 공민왕릉의 건축과 설계에는 당시 고려 사람들이 도달했던 수학 및 천문지리, 석조 건축기술, 조형예술 수준이 종합적으로 집성되어 있다. 실로 공민왕릉은 지난 시기의 우리나라 역대 무덤건축과 석조 조각기술의 극치를 자랑하는 최대의 걸작으로 동양문화사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 김영사·민현구, 고려500년 의문과 진실
▷ 김은택, 고려태조왕건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2002), 토지박물관 학술조사총서 제14집, 경기도 : 남한산성 발굴조사보고서
▷ 한국문화유산답사회(2004), 돌배개
이러한 신라인들의 무성의한 편찬작업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고구려 28왕의 묘호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잘못 전달된 묘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또 후대에도 그 묘호를 그대로 물려주어야만 하는 불행한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능이 조성된 곳의 지명을 알았다는 것은 능을 찾아낼 수 있는 단초를 얻은 것이므로 그저 안타까워하고 있을 일만은 아닌 듯하다.
Ⅳ. 고려의 왕릉
1. 고려 태조 현릉(太祖 顯陵)
○ 연대 : 943년
○ 위치 :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현릉은 만수산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이다. 이 무덤에는 그의 내자(신혜왕후)도 함께 묻혔다고 전한다. 무덤무지 둘레에는 12각으로 병풍돌을 돌렸으며 그 밖으로는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무덤의 무덤 구역은 외래침략자들의 파괴와 파괴와 도굴로 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적지 않게 잃었다. 지금 무덤 앞에는 망주석 한 쌍, 상돌 한 개 문인상 한쌍, 돌짐승 두쌍, 돌등 한 개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정자각은 지난 전쟁시기에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54년에 다시 옛 모습대로 복구해 놓은 것이다.
무덤구역 석조물들의 돌다루기 솜씨와 조각 솜씨는 비교적 괜찮은데 특히 이 무덤 상돌의 받침돌 정면에 새긴 꽃무늬와 새무늬 조각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고려는 여러차례 외래 침략자들의 침략을 당하여 시조왕인 태조의 시신을 안전한 곳에 옮겨 묻었다가 가져오곤 하였으므로 현릉은 여러번 보수를 거치게 되었다.
지금의 일부 무덤시설 가운데서 고려 후기 양식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기인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무덤 건축 당시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초기의 대표적인 돌칸 흙무덤인 태조 현릉은 고려 묘제 연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2. 공민왕릉(恭愍王陵)
○ 연대: 13651374년
○ 위치: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2기의 무덤을 동서로 나란히 세워 쌍릉형식으로 만든 이 무덤은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 현릉(서쪽 것)과 왕비(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으로 이루어졌다. 공민왕은 왕비가 죽자 자신이 직접 주관하여 오랜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공사를 벌였다. 무덤구역은 3개의 층단과 아래의 경사단으로 이루어졌다.
맨 윗단의 크기는 동서 약 40m,남북 약 24m인데 그 한가운데에 2기의 무덤을 남향으로 나란히 놓았다. 무덤은 돌칸 흙무덤이다. 무덤무지의 높이는 약 6.5m이고 병풍돌의 대각 직경은 13.7m, 두 무덤무지 사이의 간격은 0.5m이다. 각 무덤무지의 둘레에는 12각으로 병풍돌을 돌리고 그 밖으로 난간을 둘렀는데 병풍돌에는 구름을 탄 12지산과 연꽃무늬를 섬세하게 새겼다. 이밖에 맨 윗단에는 한 쌍의 상돌과 범과 양 조각들 그리고 한쌍의 망주석이 있다. 두 번째 단에는 두 쌍의 문인상과 한 쌍의 돌등이 있고 세 번째 단에는 두 쌍의 무인상이 있다. 경사단의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으며 능의 원찰인 광통보제선사의 탑과 비가 있다.
이 정자각은 전에 없어져 터만 있던 것을 최근에 새로 복구한 것이다. 무덤칸은 무덤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이다. 안칸의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석 판돌을 한면에 하나씩 세워 만들었으며 천정은 3개의 판돌을 덮어서 평천정을 하였다. 동, 서, 북 세 벽면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12지신상 벽화가 각각 4상씩 배치되어 있다. 12지신상은 구름을 타고 손에 홀을 쥐었으며 머리에 관을 쓴 인물로 형상화하였다. 관 위에는 각기 자기 방위에 해당하는 동물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천정에는 하늘을 상징한 해와 북두칠성, 그리고 한 쌍의 3성을 그렸다.
안칸의 동벽에는 높이 43cm, 너비 38cm의 문을 새기고 그 밑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함을 나타냈다. 공민왕릉의 건축과 설계에는 당시 고려 사람들이 도달했던 수학 및 천문지리, 석조 건축기술, 조형예술 수준이 종합적으로 집성되어 있다. 실로 공민왕릉은 지난 시기의 우리나라 역대 무덤건축과 석조 조각기술의 극치를 자랑하는 최대의 걸작으로 동양문화사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 김영사·민현구, 고려500년 의문과 진실
▷ 김은택, 고려태조왕건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2002), 토지박물관 학술조사총서 제14집, 경기도 : 남한산성 발굴조사보고서
▷ 한국문화유산답사회(2004), 돌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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