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성리학]실학자 정약용과 성리학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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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실학자 정약용의 업적

2. 실학자 정약용의 사상
1) 철학(哲學)과 사상
2) 정치와 경제(政治 經濟)
3) 문학(文學)
4) 과학(科學)
5) 기타(其他) 사상

3. 성리학의 사상
1) 15세기의 성리학
2) 관학파의 성리학
3) 사림파의 대두와 성리학 발달
4) 성리학의 사회 윤리
5) 성리학의 철학적 과제
6) 사회정의 확립

4.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것이다. 先秦時代에 있어서는 인간이 문제이었으며 人道로서 仁이 그 중심과제이었다. 그러나 漢唐 이래로 中世에 있어서는 인간의 문제보다도 우주와 자연의 道를 문제 삼았으며 인간 이상의 보편적 법칙을 탐구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면, 宋代에 있어서는 天地와 인간이 그 본질에 있어서 여하히 합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이었다고 할 것이다. 道家나 佛敎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오랜 역사를 통하여 섭취하면서 孔孟의 근본사상을 ?로 하고 그 시대사상을 用으로 조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가장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 太極이며 이 태극을 자세히 이해하려면 문제를 바꾸어 理氣論이 되는 것이다. 태극과 理氣의 문제는 天道에 관한 것 즉 우주자연의 근본원리를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요, 인간에 있어서 太極과 理氣를 말하면 心性論이 되는 것이다. 心性論은 다시 性情문제로, 性情문제는 善惡문제가 되며, 人心道心說 등 윤리적 과제가 일어나는 동시에 이것의 실천방법을 말하면 수양론으로서 誠敬靜 등의 구체적 현실적 문제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은 고려말의 학자 安珦에 의하여 원나라로 부터 전래된 이래 당시 국교화 되어있던 佛敎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비판적 이론의 근거로서 많은 연구가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정몽주는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는 못하였지만 朱子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여 「東方理學의 祖」로 추앙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초창기부터 불교국가였으며 비록 말기에 타락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교단의 부패였지 신앙계에서는 여전히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자학은 쉽사리 자리잡기가 어려웠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현실적인 정치는 儒家의 이념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지만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는 그 권위가 불교를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고려말 신진 유학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지자 신진 유학자들은 신라시대부터의 불교를 배척하고 주자학을 내세웠던 것이다. 주자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한 것은 유교주의적 정치이념을 더욱 구체화 현실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6) 사회정의 확립
주자학을 확립시키는데 노력한 사람 가운데 정도전은 잊지 못할 사람이다. 그는 교려말부터 주자학에 관심을 쏟은 바 있었지만 조선왕조에 들어서서는 국가의 제도 법전 교육을 주자학적 이념에 근거하여서 재편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가의 이론을 이단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유교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학문적 탐구로 또는 정책적 실현으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는 데서 근세 유학사에나 정치사에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정도전은 성리학의 근본문제를 理, 氣, 心, 性, 情의 개념에 근거하여서 불교의 心과 道家의 氣 개념을 대조시켜 비판하는데 그 철학적 문제에 대한 논변의 촛점이 놓여있다고 하겠다. 즉 불교는 현상세계를 부정함으로서 心의 본체를 파악하려는 것이고, 道家에서는 사려 분별을 떠남으로서 氣를 기르려는 부정의 논리를 주장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편벽된 논리라고 비판을 하고 이 양자를 더욱 근원적인 포괄개념(즉 理)에 흡수시킴으로서 통일과 조화를 추구하는 유가의 입장을 밝히려 하였다는 데에 그의 논리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비판하는 가장 큰 동기는 철학적 문제에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에 누구나 실감하고 있었던 불교의 사회적 폐해를 체계적으로 비판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학의 기본 특성은 사회와 윤리의 문제를 중시하며 그 근본 개념에는 修己와 治人의 道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유학적 입장에서 불교의 출세간적 계율에 따르는 세속적 질서의 거부나 타락한 승려의 말폐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麗末鮮初의 역사적 전환기에 있어서 성리학은 革新派(鄭道傳, 權近 등)의 天命論과 守舊派(鄭夢周, 吉再 등)의 綱常論으로 대결을 하게 된다. 전자는 조선의 건국이념을 제시하는데 공헌을 하였다면 후자는 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다가 죽거나 두문불출하여 의리를 지켜 이후 조선조 성리학의 의리학적 학문 전통을 세웠던 것이다. 성리학의 학파적 계승은 고려말의 정몽주로부터 시작하여 조선왕조에 벼슬을 하지 않고 향리에서 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던 吉再로 이어지고 그 뒤로 金叔滋, 金宗直, 鄭汝昌, 金宏弼, 趙光祖, 退溪, 栗谷에 이르러 그 학문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이들은 절의를 존중하고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던 재야 유학자들 즉 士林세력으로서 이들이 중앙관계에 진출하면서 여러 대를 관료로서 활약하던 훈구세력과 대립하였으며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를 소인으로 규정하여 배척하고 의리정신에 입각하여 사회정의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4. 결 론
새로운 사상의 수용은 중세사유로서의 진보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학파 또는 정파의 분열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이 고대하는 바의 붕당정치의 원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란 뜻은 아니며 현실관, 정치관의 차이가 개재된 분파였다. 17세기의 학문경향으로 달리 주목되는 것은 예학의 발전이다. 정치 현상인 예송문제는 이런 학문 경향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예의 기준이 정치적으로 문제된 것은 정치의 본령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의 추구라는 특별한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정치적 분쟁이 심했던 조선후기 역사에서 정치가 대립적 양상을 보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권력분쟁으로 간주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론과 실제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과 유리된 이론 또한 있을 수 없으므로 이론이 바탕이 된 정치의 실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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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조선성리학의 재평가 - 창작과 비평.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삼인, 1998
정옥자,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일지사, 1998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홍덕기 「茶山 丁若鏞의 土地改革思想 硏究: 閭田論을 중심으로」, p73~135, 전남대학교, 1990
유봉학, 김동욱, 조성을 공저,「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백산서당,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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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13
  • 저작시기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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