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루스 다미아니와 중세의 교회개혁운동] 을 읽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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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의 추기경-주교들에게 줌으로써 지방적인 로마 귀족정의 권한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셋째는 니콜라스의 교황선출에 대한 교회법적 적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당화의 소급적용이었다.
(2) 교회개혁에 있어서 「교황선출칙령」의 역할
교권이 세속 권력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교황과 황제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는 시점에 이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이 공포되면서 새로이 주목받게 된 것이 추기경 또는 추기경단의 존재와 위상이다. 또 선거에서 야기되는 혼란을 방지하고, 평신도인 황제나 하급 성직자들의 개입을 차단하며 또 무분별한 후보자들의 난립을 막아내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교회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등 당시 교회의 안정과 종교생활의 자치권 확립을 위해 기여한 점에 대해 평가할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교황선출칙령」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상당히 커진다. 그것은 단순하게 교회 안의 일만도 아니었고, 당대에 국한되는 영향력만을 미친 것도 아니다. 그것이 다루고 있는 것도 교황선출에 국한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표면상으로야 어떻든 그것은 교황과 황제 사이의 문제외에 교회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설정과 관련해서도 당대의 관점이나 생각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제 6장. 급진적 개혁이념과「교황수장령」
1. 교회 우위적 관점의 교회, 국가관과 교회개혁운동
(1) 교회개혁 이전 시기의 교회, 국가관
로마제국은 국가의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의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취해 왔던 온건한 태도를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기독교도들의 많은 희생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개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교회와 국가가 협력하거나 갈등해야 할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기독교에 대한 세속 사회의 태도 또한 바꾸어 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는 국가 위에 있으며, 국가가 교회에 종속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의 신적 기원, 그리스도의 대행자로서의 기능, 국가에 대한 시민적 복종과 같은 것들을 모두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스승과 제자인 이 두 사람에 의해 이론적 토대가 놓여진 교회, 국가관은 레오 대교황과 교황 겔라시우스에 의해 현실 생활에 적용되면서 그에 수반되는 문제점들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를 거치면서 나타나게 된 교회, 국가관의 형성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교회 우위적 관점의 교회, 국가관
훔베르트의 개혁이념을 교회, 국가관이란 주제 아래 정리해 보는 것은 중세의 교회개혁운동에 대한 이해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 이다. 여타 교권론자들과 마찬가지로 훔베르트에게 있어서도 교회 혹은 교황권의 지위에 대한 평가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다. 교회개혁과 관련해서 훔베르트가 자신의 생각을 노골화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행적이나 저작은 교회 지도자 또는 교회개혁가로서 그의 급진적 성향을 잘 드러내 보여주었다. 정리하자면 훔베르트는 로마의 수장권을 위한 투쟁을 시작함으로써 미래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로마 교회나 교황의 독자적인 지배를 확보함에 있어 튼튼한 기초를 제공하는 인물이 되었다.
2. 힐데브란트의 교황취임과「교황수장령」의 의미
힐데브란트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름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일은 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그가 교황으로 옹립된 일은 교회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그가 교황의 위에 오르던 당시에도 교황정치의 방향설정과 연관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교황수장령」은 교황에 취임한 이후 그레고리우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론적 정리이자 향후 개혁의 완성을 위한 지침서의 성격을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볼 때 「교황수장령」에 대한 분석은 당시 교회의 개혁운동을 이해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3.「교황수장령」공포 이후의 교회개혁운동
「교황수장령」을 통해 자신의 개혁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 세계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활발한 조치와 행동들을 이어나갔다. 이같은 교황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그가 남긴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다. 먼저, 1076년에 그가 하인리히 4세에게 보낸 편지, 1076년에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선언한 문서, 독일 제후들에게 보내는 편지, 세속 서임을 금지하기 위해 1078년에 공포된 칙령, 1080년에 선언하였던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두 번째 파문과 관련한 문서, 그리고 1081년에 메쯔의 헤르만에게 보낸 편지 등이 그것이다.
시간이 좀더 지난 뒤에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과 유사한 이념적 맥락에서 교회의 권위를 강화시켜 나가려 했던 인물은 인노센트 3세와 4세 였다. 결국 교황과 황제의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리는 그 누구의 것도 되지 못하였다. 정리하면 그 투쟁은 훔베르트와 다미아니의 이론적 대립의 시기.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서 노골화된 것으로 교황권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기간 외에 인노센트 3세 때의 절정기라는 과정을 밟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노센트 4세 시대에 이르러 교회와 국가는 자신들이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정치와 종교 각각의 사이에 간섭을 최소화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느낀점>
처음에 책 제목을 봤을 때 너무나 생소하게 다가온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미아니라는 사람의 이름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지만, 일단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고정관념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다. 다미아니는 은둔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생활의 철저한 실현 및 그 이념에 기초한 교회개혁과 기독교적 이상으로의 삶을 구현하자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평신도, 남녀의 차별을 없애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힘쓰기 보다는 개인의 삶에 급급한 오늘날의 신자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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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03.22
  • 저작시기200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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