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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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부의 비밀 15가지

3. 결론

본문내용

서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것이다.
13. 열세 번째 비밀
-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동학혁명으로 난리에 휩싸여 활빈당이 불평있는 농민을 규합하여 의적으로 자처하고 탐관오리, 부잣집을 불태우며 약탈과 살인을 서슴치 않았을 때 최세린의 손자 현식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현식은 활빈당이 최 부자의 서고인 사마소를 불태우려 했을 때 최 부자의 소작인들과 하인들이 최 부자가 베푼 덕에 감복하여 활빈당을 말렸으며, 최 부자는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마당에 멍석을 깔고 군데군데 장작불을 지피고 소를 잡아 술상을 내오게 하였다. 그러니 활빈당의 굶주린 농민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난이나 활빈당 등의 난리 와중에도 최 부잣집은 불타지 않고 온전히 재물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도 선대 때부터 아랫사람이나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어 온 덕 때문이라 할 것이다.
14. 열네 번째 비밀
- 2등을 위해 1등만큼 노력한다.
최세린의 호가 ‘대우’였던 것과 같이 최현식의 호 또한 ‘둔차(鈍次)’로써 ‘재주가 둔하여 으뜸가지 못하고 버금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너무 똑똑하거나 으뜸가는 것을 추구하다가는 다른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호를 그렇게 정하였다. 최현식의 호가 둔차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최 부잣집의 가풍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1등주의’에 이념을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1등주의는 경영자적인 측면에서 종업원들을 독려하고 채근하여 능률을 올리려는 목표로는 유용할 수 있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이고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견제와 시기, 질투, 모함, 음해 등이 기다리고 있다.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참고 이겨야 한다. 그에 비해 2등은 편안하다. 남의 눈에 두드러지지 않고 경쟁에서 약간 비켜 설 수 있으며 시기와 모함과 질투를 적게 받는다. 그러면서도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다름없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고 2등이 되더라도 만족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와 상통한다. 스스로의 분수를 알고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할 줄 아는 자세, 그것은 “만 석 이상은 하지 말라.”라는 가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렇게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15. 열다섯 번째 비밀
-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경주 최 부잣집은 최진립과 그의 아들 최동량이 세운 기틀에서 최국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최의기, 최승렬, 최종률, 최언경, 최기영, 최세린, 최만희, 최현식에 이어 10에 이른 최준에 이르러 드디어 부자의 막을 내린다. 최 부잣집의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어려서부터 신식학교의 학업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그는 한일합방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제일 먼저 할 일이 민족의 계몽이라고 생각하여 경주 향교를 빌려 간이 학교를 설립하고 인근의 백성들과 아이들을 불러 무료로 글을 가르쳤다. 그러나 간이 학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최준은 언젠가 제대로 된 정식학교를 만들어 보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 이후 최준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경주의 유물이 일본인들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유물들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 총독부에서 차기의 학무국장으로 최준을 추천한 것을 슬기롭게 거절하면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될 수 있었던 길을 피하기도 하였다. 광복을 맞이하면서 최준은 그토록 꿈꾸어 온 인생의 목표를 이루려 했다. 그것은 독립된 나라에서 대학을 설립하여 국가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최준은 이제까지 품어 온 꿈을 실행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을 설립하였고, 대구 대학에 기부하고 남은 재산을 계림 대학을 창설하였다.
최준은 젊은 시절 경주 단석산에서 노스님이 한 말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재물은 분뇨와 같이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골고루 사방에 흩으면 농작물의 거름이 되는 법이다. 재물을 모으기만 하고 좋은 곳에 쓰지 않음은 똥통에 들어앉아 있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최준이 대구 대학의 설립에 넣고 남은 전 재산으로 계림 대학을 만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논밭은 물론 자신이 살던 경주의 집 두 채까지 몽땅 넣어 버렸다. 이후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 통합하여 영남대학교가 탄생하였다. 최준의 나이는 이미 여든넷의 고령이었다. 그는 통합 후 잠시 이사직을 맡다가 이내 손을 떼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통합된 대학교가 발전하는 모습을 본 그는 이 한마디로 아무 미련 없이 손을 털었다. 『영남 대학교 50년사』에서는 최준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00여 년을 지켜 온 가재를 사회의 공기, 향토 인재 양성을 위해 일거에 쾌척함은 실로 그의 가계만이 지닌 유서 깊은 전통 가운데 함양된 그의 고매한 지조와 용단으로서만이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기증한 가재와 장서는 영남 대학교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고 민립 대학으로서의 대구 대학을 사수했던 그의 숭고한 교육 정신은 길이 영남 대학사와 함께할 것이다.......
최 부잣집의 10대에 걸쳐 내려오던 만석의 부를 어떻게 유지해 왔는지는 앞에서 이야기한 열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부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비밀, 네 번째부터 여덟 번째 까지는 재산을 일구기 위한 비밀, 아홉 번째부터 열네 번째까지는 재산을 지키기 위한 비밀, 열다섯 번째는 부를 가치있게 버리는 비밀로서 부를 일으켜 마지막 정리할 때까지 그 비결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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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27
  • 저작시기2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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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2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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