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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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심리학과]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그림자
1) 그림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 상징적 행위로 삶의 균형 이루기
3) 그림자 투사하기
4) 그림자 안에 숨겨놓은 황금
5) 그림자 속에서 찾는 중년의 에너지
6) 의례로 그림자 표현하기

2. 낭만적 사랑과 그림자
1) 사랑에 빠진다는 심리적 의미
2) 강력한 로맨티시즘의 체험
3) 모순을 초월한 역설의 위대함
4) 역설이 삶에 가져다주는 기적
5) 사랑과 힘의 딜레마
6) 그림자 감싸안기

3. 만돌라
1) 분열된 세계를 치유하는 힘
2) 만돌라, 치유의 예술
3) 창조의 싹을 틔우는 신의 그릇

본문내용

는데, 이런 헌신과 결속이 둘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인해할 힘을 부여한다.
6) 그림자 감싸안기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는 것은 곧 영성을 체험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서와 세계 신화는 공통적으로 가장 평범한 장소나 사건에서 신성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신화적으로 표현하면 가장 값비싼 진주는 일상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어느 집이든 지붕만 걷어내면 신들의 드라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누구의 생애이든 지붕을 벗겨내보라. 그리하면 역설을 발견할 것이다. 역설은 종교적 삶, 즉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위대한 비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는 자아의 우월감이 깨어지도록 만든다. 자아는 항상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착각으로 행동했는데 그렇다고 "아 그렇다면 나는 그저 모든 걸 포기하고 아무 결정도 내리지 말아야지. 시간을 끌면서 꾸물거릴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자아의 우월감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잘못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마땅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에 동의한다는 것은 곧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는 자아보다 훨씬 큰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지점, 해결책이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정확하게 일어난다. 이 순간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큰 곳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순간이다.
3. 만돌라
1) 분열된 세계를 치유하는 힘
만돌라는 놀라운 치유력과 힘을 부여하는 기능이 있다. 우리가 삶의 투쟁으로 쇠진해 있거나, 용기를 잃어서 더 이상 상반된 두 대극 사이의 긴장을 견딜 수 없을 때 만돌라는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아무리 노력하고 견뎌도 고통스런 삶의 모순을 다룰 수 없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돌리다. 만돌라는 우리들의 삶이 문화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으로 이동하도록 도와준다. 만돌라는 분리의 치유로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시는 이것이 저것이라는 확신을 토대로 쓰이지 않는다. 이미지가 겹쳐질 때 우리는 통합이란 신비적 진술을 듣게 된다. 시를 통해 파편화된 세계에서 안전과 확신이 존재함을 느끼는 것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주는 화합의 선물이다. 위대한 시는 이러한 도약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통합한다. 우리가 항상 정반대라고 생각했던 것들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놀라움이자 충격이다.
2) 만돌라, 치유의 예술
모든 말은 만돌라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장은 만돌라의 특질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그토록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문장은 분열된 세계를 통합하지만, 조악하고 빈약한 문법구조로 구성된 문장은 상처를 입힌다. 아마도 중첩된 부분이 너무 적어서 통합하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잘 다듬어진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곧 이원성에서 벗어나 통합을 이루는 길이다. 이는 엄청난 치유와 회복력을 지니고 있는데 마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모두 다 치유자이며 시인이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마다 만돌라를 만들게 된다. 좋은 이야기들은 모두 만돌라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것을 만하고 또 저것을 말하다. 그러다가 점차 이야기의 기적적인 힘으로 두 대극이 서로 겹쳐지고, 마침내 똑같아진다. 이야기는 선이 악에 대항해서 승리하는 것을 토대로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심오한 진리는 선과 악이 하나로 되는 것이다. 통합을 이루는 우리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수의 이야기들은 이런 결말에 관한 힌트만 제시하고 끝이 난다. 그러나 어떤 통합이든 심지어 이런 사소한 힌트조차도 통합된다는 의미에서 치유를 뜻한다.
만돌라 만들기는 언어 형태의 표현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화가는 형과 색의 시각적 긴장으로 만돌라를 그리며, 음악가는 리듬과 형과 톤으로 만돌라를 창조한다. 만돌라는 또 춤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만돌라에게는 자책을 위한 여지가 없다. 방종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의식적인 작업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 죄책감은 역설의 값싼 대용품이다. 우리는 죄책감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서로 다른 진실을 들여다보는 용기 있는 행위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낫다. 죄책감은 교만에서 온다. 어떤 이슈 중 한쪽을 택해서 그쪽이 항상 옳다는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편향성은 문화화되는 과정이지만 종교적 삶에서는 심각한 장애가 된다. 직면할 힘을 잃으면 통합의 기회를 놓치며 만돌라의 치유력도 상실하게 된다.
3) 창조의 싹을 틔우는 신의 그릇
인간의 삶은 만돌라로 볼 수 있다. 삶의 장에서도 두 대극적인 요소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모두 다 구원자들이며, 그리스도는 이 과업을 이룩한 인간의 전형이다. 남녀의 만나도 모두 만돌라인데, 두 대극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만나는 장이고 또 서로를 존중하는 장이다.
인간의 상황은 거듭해 우리를 자아 그림자의 대극으로 나눈다. 이것이 바로 성 아우구스투스가 "행동하는 것은 곧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그림자를 짊어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전쟁, 폭력, 인종차별 같은 집단형상으로 그 값을 지불할 것이다. 종교적인 삶이 하늘과 지복천년 같은 다른 영역을 내적 삶의 절정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문화와 종교는 목표가 서로 다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색채의 향연인 파바니스에 도달할 때까지 이 여정을 멈춰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삶의 다양한 색채들이 제 빛을 내지 못하고 회색을 만들어낸다. 회색은 모든 색깔이 뭉쳐 중성화가 일어나면서 우중충한 단조로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진행이 올바르면 파바니스가 만들어진다. 삶의 모든 색채가 장엄하고 풍요로운 그림을 드러낸 것이다. 만돌라는 중립지역이나 타협의 장소가 아니라 공장의 꼬리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무지개가 뜨는 곳이다.
<참고문헌>
로버트 A. 존슨 지음 | 고혜경 옮김,《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낯선 나》(에코의서재, 2007)
  • 가격20,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9.03.31
  • 저작시기200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7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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