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도서관(페르가몬 도서관)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서론

2. 고대 그리스 사회의 개관

3. 기록물 재료의 발전
3.1. 오스트리카(도편)
3.2. 파피루스
3.3. 파피루스 제조와 사용

4. 책의 역사

5. 그리스 도서관의 역사
5.1. 도서관 생성의 역사적 필연
5.2. 연도별 그리스 도서관의 변천
5.2.1. 그리스 최초의 도서관
5.2.2. 기원전 1600 - 1200년
5.2.3. 기원전 9세기
5.2.4. 기원전 5세기
5.2.5. 기원전 4세기
5.2.6. 헬레니즘 시대의 도서관

6. 그리스 도서관의 종류별 구분
6.1. 사설 도서관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도서관)
6.2. 공공 도서관

7. 페르가몬 도서관
7.1. 페르가몬
7.2. 페르가몬 도서관의 역사
7.2.1. Attalus 1세
7.2.2. Eumenes 2세
7.2.3. Eumenes 3세
7.2.4. 로마 페르가몬 시대
7.2.5. 현재의 페르가몬 도서관

8. 결론

9.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BC 241-197)
아탈로스 왕조는 기원전 3세기 중기부터 약 100년간 소아시아의 북방에 번영한 왕조였지만, 그 수도 페르가몬을 중심으로 그리스문명을 발전시켰다.
Attalus 1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개인 예술품을 구비한 예술 애호가였다. 또한 페르가몬을 정교한 조각의 도시로 만들었다. 아테네 신전에 문고를 설치했다. 이곳은 현재 터키의 페르가몬으로 당시는 그리스와 동방제국과의 교통의 요지였다. 이 문고는 아테네 신전안의 주랑의 네 개 방에 위치해 있으며 구조는 방 1개는 길이 16m, 넓이 14m의 접견실이고, 나머지 방 3개는 길이 13.4m, 넓이 7 - 10m로 각방 서고로 구분된다.
7.2.2. Eumenes 2세 (재위 BC 197-160)
페르가몬 도서관이 유명한 이유는 파피루스 권자본 소장한 것이 큰 몫을 차지하며, 양피지(pergamena)도 유명하다. 페레가몬 도서관의 양피지를 개발시킨 사람이 바로 도서관을 확장 발전시킨 2대왕 유메네스 2세였다. 아탈로스 왕의 긴 체세 후반부터 다음 왕 유메네스 2세의 초기에 걸친 이 왕조의 극성기에 국위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비견할 정도가 되었다. 비록 1세기 늦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모델로 조직과 목록화를 실행하였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이 두 왕은 서적을 열심히 수집하여 장서는 20만 책에 달하였다. 또, 시인, 학자와 예술가를 초빙하였으므로 페르가몬은 그리스문명의 일대중심지가 되었다. 한때 아리스토파네스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초빙 시도 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5세 (재위 BC 204-180)의 초빙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프톨레미와 유메네스는 서적을 수집하는 것으로 경쟁하였는데, 프톨레미는 유메네스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이상으로 많은 서적을 수집하는 것을 우려하여 이집트의 특산물로 기록매체인 파피루스를 페르가몬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 시켰다.
파피루스를 구할 수 없었던 민족들은 얇게 말린 짐승 가죽에 기록을 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이 조잡해 필기도구로는 파피루스와 경쟁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집트의 파피루스 수출금지는 페르가몬 왕국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기록을 하지 못하고 또 책을 만들 수 없게 되면 지식과 정보에서 경쟁국인 이집트에 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그 시대에는 책이 지식과 정보의 귀중한 매체이자 한권의 값이 도시의 집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전제품과 정보기기에 들어가는 칩을 얻을 수 없게 된 셈이니 페르가몬이 느낀 위기의식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유메네스 2세는 파피루스를 대신할 수 있는 서사 자료를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페르가몬의 학자들과 기술자들은 가죽을 석회 물에 2주 동안 담갔다가 틀에 팽팽하게 잡아 말리면 파피루스에 버금갈 정도로 얇은 가죽을 만들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렇게 해서 양피지가 발명되었다.
그래도 문제가 남아 있었다. 양피지를 아무리 얇게 만들어도 파피루스보다 몇 배 두꺼워 두루마리를 만들 경우 지나치게 부피가 컸다. 이에 대한 페르가몬 사람들의 대응 방법 방법도 상식적인 것이었다. 페르가몬 사람들은 양피지를 둘둘 마는 방법 대신 네모반듯하게 잘라 한쪽 귀퉁이를 끈으로 묶었다. 이로써 현대 책 모양의 ‘코덱스(codex)'가 출현했다.
이상 위의 내용은 로마의 학자 바로가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유럽의 중세를 통해 서적제작의 주재료가 된 양피지의 기원은 페르가몬에서 발생되었다. 그러나 페르가몬에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양피로 서적을 제작한 것은 아니고, 파피루스 수출금지에 대한 단순한 일시적인 대책이었다.
7.2.3. Eumenes 3세 (재위 BC 133-129)
페르가몬 도서관은 일시 대번영하여 말로스의 크라테스와 같은 학자가 관장에 임명되고, 장서목록도 작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러한 성황도 그 후 오래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후계자가 없던 아탈로스 왕조 최후의 왕 유메네스 3세가 페르가몬을 로마에 유증함으로서 끝이 나고 만다.( BC 129)
7.2.4. 로마 페르가몬 시대
그로부터 약 90년 후인 기원전 43년 동방속주의 지배권을 얻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영지인 페르가몬에 있는 도서관의 방대한 20만 책의 장서를 애인인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기증하여 20만 장서는 알렉산드리아로 운반되었다. 이 내용은 로마제정시대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쓴 유명한 <영웅전>에 기록되어 있다. 안토니우스가 이 도서관의 장서를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곳으로 옮긴 이유는 기원전 48년 시저의 공격으로 알렉산드리아 왕궁의 도서관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 부흥을 기도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겠는가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7.2.5. 현재의 페르가몬 도서관
페르가몬의 유적은 1878년과 1886년 두 차례 걸쳐 독일의 발굴학자 허만과 고고학자 콘츠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건축양식은 아테네문고 양식이었으며, 신전에는 아테나(Athena)신상을 모셨다. 문고는 신전의 북쪽 주랑 밖에 두었는데, 외부 지붕은 홍예형이고, 네 개의 방으로 이루어졌고 그 중 세 개의 방은 서고였다. 발굴된 유물의 대부분은 독일로 옮겨져 지금은 동베를린의 페르가몬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
8. 결론
지금까지 그리스의 장서와 도서관의 생성 발달 과정과 기록물 재료 등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고, 페르가몬 도서관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그리스는 단순히 해양문명에서 시작해 폴리스들 간의 경쟁 속에서 민주정치가 화려하게 꽃피우던 시대다. 그런 민주정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도서관의 공헌이 컸음을 알게 되었다. 문헌이 창출하는 거대한 효과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9. 참 고 문 헌
古代 圖書館史의 再照明:메소포타미아 地域을 中心으로 / 박준식
고대도서관의 역사 / 라이오넬 카슨, 르네상스
도서. 인쇄. 도서관사 / 김세익, 아세아문화사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 에튜 베틀스, 넥서스
西洋圖書館史 / 전명숙, 지문사
西洋圖書館史 / 이춘희, 한국 도서관 협회
정보문화사 / 배현숙, 아세아 문화사
브래테닉 백과사전
  • 가격3,0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9.04.01
  • 저작시기2009.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743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