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주의][인종차별][인종주의]미국의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쿠바와 독일의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영화를 통해 본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사례를 통해 본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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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종차별주의][인종차별][인종주의]미국의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쿠바와 독일의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영화를 통해 본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사례를 통해 본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Ⅲ. 쿠바의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Ⅳ. 독일의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Ⅴ. 영화를 통해 본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Ⅵ. 사례를 통해 본 인종차별주의(인종주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국에 돌아갈거니?\" 라는 질문이다.
\" 응 나는 돌아가고 싶어. 그런데 자리가 있을지 걱정이야\"라고 별 생각 없이 답변을 하곤 했는데,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던 인도지역에서 온 친구는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인종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속에는 우리는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백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백인이 아니면 미국인이 아닐거라는 의심부터 하는게 인종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별 의식 없이 돌아가고 싶어 어쩌구 답하는 나를 은근히 한심하게 바라 볼 때는 내가 다다를 수 없는 산을 보는 것 같은 아득함이 있었다.
미국에서 인종문제는 가장 민감한 문제이다. 다양한 피부색깔의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배경의 사람들이 다양한 미국진입시기를 가지면서 살고 있고, 피부색과 계급이 어느 정도 일치하기도 해 더 민감해 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80년대 이후 백인중산층의 관심과 이슈만을 주로 다루는 여성운동에 반기를 들면서 흑인 여성주의 제 3세계 여성주의가 새로운 이론적 도전을 하기 시작했고, 점점 여성학안에서는 인종차별주의가 새로운 뜨거운 감자가 되어갔다. 가장 조심스러우면서 가장 날이 선 최신의 첨단의 문제가 되었고, 교수의 정치적 진보성, 올바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여성학과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인종차별주의와 관련된 수업시간이나 면담시간에 말 몇 마디가 문제가 되서 집단적 규탄의 장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고, 그때 날이 선 눈빛과 공격성이 정당하게 여겨지는 그 힘을 보면서 늘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었다. 내가 공격의 대상이 안 되고 있는 것만이 천운으로 여겨졌던 살얼음을 걷는 상황이었다. 물론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어릴 적부터 수없이 당하면서 쌓여온 경험적 분노가 부재한 탓도 있지만, 뭐든지 아는 만큼 본다고 아주 노골적인 천대 말고는(이런 것도 꽤 여러 번 당해보았다) 인종문제에 고민해본 순간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알게 모르게 깊게 베여있는 인종적 편견이나 표현들을 도저히 감지해낼 수 없었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백인이 아니라는 것만이 방패막이가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그 인종차별의 강한 도덕적, 규범적 힘을 당연하게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본인이 의도적으로 하는 인종차별발언과 무의식적인 실수와의 질적인 차이가 인정이 안 되는 분위기의 경직성에 대한 답답함, 인종차별발언을 하는 장소나 맥락의 문제, 즉 배우는 공간에서 하는 발언과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자리에서 하는 발언과의 질적 차이가 늘 국회의원 발언 수준으로 취급되는 그 과도한 진지함에 대한 불만, 일상성, 사적인 영역의 강조 속에서 모든 발언이 무차별적으로 다 너무 긴장되게 취급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인종차별을 하지 않으려는 선택의 자발성을 높이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였다. 말과 행동의 규범이 너무 빽빽이 들어서고 그에 못 미치는 것에 대해 여유와 아량이 설 자리가 없이 그 규범이 성역화 되어 버리는 문제. 다시 말해 자꾸 눈치를 보게 하는 집단적 검열문화가 겉 자랄 가능성이 위험하게 보였었다.
그것은 사생활에 새로운 규범을 자꾸 만드는 방향일 수도 있고, 개인성에 대한 이해를 너무 단순하게 하기도 한다. 사실 한 개인의 모든 차별에 대해서 일관되게 같은 깊이와 넓이로 대응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경험하고 반응할 수 있는 폭이 한계가 있고, 사고방식과 능력, 자라온 감수성의 차이에 의해서도 각 개의 차별에 반응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설혹 민감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늘 실수하고 생각이 못 미치는 듯한 발언을 하는 적도 많다. 나의 경우 여성문제에 꽤 발달한 감수성을 가진 것 같은데도 권가 성을 따져대는 실수와 같이 \"아니 여성학을 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서 비판당할 만한 한계를 내보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한 개인이 자신이 개인적 공간으로 여기는 곳에서 보여주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음에 대한 관대함이나 여유는 사실 여유차원의 문제가 아닌 게 많다. 실제로는 다분히 복합적인 개인성을 재단할만한 정치적인 옳음이 있을 수 있는 가의 문제와 만나기 때문이다. 또 나의 이야기를 해본다면 워낙 연예인을 좋아하고 TV 보면서 사람품평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품평의 수준이 \'주인공 얼굴이 저게 뭐야\'. \'코가 저렇게 생긴 게 어떻게 연예인이 되었니\', \'저 남자주인공이 나오면 나는 괴로워. 못생겨서 사랑의 환타지를 꿈꿀 수 없어\' 수준의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하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딸에게 한 평소의 주문에서 일관성이 한창 떨어지는 말들이다. 그럴 때 누군가 나에게 너는 여성학을 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헐리우드적인 외모를 기준으로 사람평가를 일삼느냐고, 그 당사자가 들으면 뭐라고 하겠느냐고 정색을 하고 나오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그런 나의 모습으로 나의 인격전반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의지를 의심한다면, 또는 남에게 \'개는 그렇게 일관성이 부족하더라\'라고 비판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기도 하다. 그러나 외모차별의 현실에 비판하는 만큼이나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고, 환타지의 세계에서 대리만족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사실, 내 개인의 공간에서 반 환경적이거나 정치적으로 틀린 일들을 하기도 한다는 것. 긴장을 풀기위해서 대중문화에 편하게 탐닉하는 순간을 허용하고 싶은 마음, 옳은 것에서 흐트러지고 싶은 욕구 등, 가치관을 일관성 있게 실천하는 장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욕구와 일탈과 모순의 복합체인 개인성의 영역이 분명있다.
참고문헌
◎ 김용욱, 미국 인종차별의 근원과 진정한 해결, 다함께, 2005
◎ 박상진, 미국에 있어 흑백간의 평등권에 관하여
◎ 이종오,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실행들(2), 국제 지역학 잡지, 2005
◎ 인종차별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최종평가서, 2003
◎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1998
◎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 Jelloun, Tahar Ben, 각국의 국가이행보인종차별, 야만의 색깔들, 상형문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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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0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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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27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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