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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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전쟁의 배경

3. 남북전쟁의 전개와 휴전협상

4. 전쟁의 영향

5. 결 론

본문내용

냉전의 전개상황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자.
(1) 북 한
북한은 전쟁의 종결 후 남로당 계열의 숙청을 진행하여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확고히 다진다. 남로당계의 숙청은 정전협상 중에 박헌영을 체포한 데서 시작한다. 박헌영은 당시 김일성과 함께 당 내의 가장 유력한 실력자로서 어쩌면 둘 사이의 권력투쟁은 필연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당시 한국전쟁의 실패와 일본 공산당 활동의 실패로 인하여 소련의 스탈린은 그에 대한 원인추궁과 숙청작업을 진행하였는데, 박헌영은 이와 관련하여 소련으로부터 스파이 혐의로 숙청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박헌영은 체포되고 김일성은 권력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남로당계의 본격적 숙청이 시작된 것은 53년 7월 2일, 허가이의 자살이다. 그는 당시 부수상직에 있었는데 미군폭격에 의한 긴급복구공사 지연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소련 공산당의 신임을 상실하고 있었고, 체포된 박헌영 그룹과 연루확대될 것을 예감하고 자살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허가이의 자살이 있은 지 1달 후인 1953년 8월 3일, 남로당계의 재판이 진행되어 리승엽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계 12명은 스파이 행위와 서울점령시의 잔학행위, 공화국 전복음모 등의 혐의를 받고 숙청된다. 그리고 이틀 후 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박헌영을 대상으로 한 비판을 전개하고, 중앙위원회 조직위원회를 폐지하고 중앙상임위원회를 선출, 당규약 개정위원회를 재편하여 박헌영파를 일소하고 만주파와 소련계를 중심으로 한 김일성 중심의 권력구조를 확립한다.
정부군당을 지배하에 둔 김일성파는 전후 복구사업과 혁명적 군중노선을 전개하여 후에 주체사상을 형성하는 기반을 마련하고 정치교양 사업과 당의 선전선동사업을 강화하여 대미적개심을 고취시킨다. 이와 같이 북한이 주체사상을 강조하고 군중에 대한 선동사업에 집중했던 원인은 전쟁의 발발 후 포격에 의한 생산시설의 파괴로 물적 자원의 황폐화된 상태에서 인적자원에 대한 동원에서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 남한이 미국의 대대적 원조를 받고 있었던 데에 비해 북한은 소련에 대한 상대적인 의존도가 낮았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2) 남 한
북한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진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한사회에서도 극우화가 정착되었다. 전쟁 이전 남한 사회는 43사건과 여순사건이 보여주듯 해방 이후 형성된 좌파 헤게모니와 지배체제 내의 우파 헤게모니 사이의 괴리가 나타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된 후에 좌파 헤게모니는 남한 내에서 소멸되고 미군정의 비호에 의한 ‘우파단정’이 남한 사회 전체를 장악한다.
이러한 우파정권이 장악하게 된 원인은 전쟁에 대한 인적물적 피해경험과 북한의 남한점령책의 실패로 인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반공반북의 이데올로기가 남한사회 내에 깊이 침투를 용이하게 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1980년대 중반까지 국가보안법사회안전법 등의 법적도구와 국가기구에 의해 재생산되어 남한 내의 지배 이데올로기 형성의 가장 큰 축을 형성한다.
또 ‘1민족 2국가’의 분단체제가 고착화됨에 따라 억압적 국가기구의 양적질적팽창을 가져오게 되는데, 특히 군의 중요성이 급속히 부상한다. 또 전쟁으로 인한 입법부의 활동이 위축되고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어, 후에 군사독제체제가 발생하고 지속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한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큰 헤게모니가 ‘반공’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국가 지배의 정통성을 가진 집단은 해방 후 ‘항일세력’에서 ‘반공세력’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사회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요인이 전개되어 확립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한국전쟁을 거쳤기 때문에 급속하고 강렬히 정착되었다. 이로써 남한은 정치상층부에서 사회의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하게 된다.
(3) 냉전의 본격적인 전개
1954년 4월 26일 제네바 회담이 시작되어 남북한 간 통일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남북 양국과 미국, 중소 간의 의견차만 드러내고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은 끝이 나고 정전협정 체제가 무한히 계속되었다. 한반도 내에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이어진 국토의 황폐화와 사람들에 대한 정진석인 충격은 남북사회의 이질화를 결정적으로 진행시켰다. 남북한 사회 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각각 자유주의 체제로 대변되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의 길 뿐이었으며 이 둘은 절대 교차되거나 타협의 여지를 마련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길이었다. 한반도는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진영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의 최전방 기지로서 모든 냉전적 상황을 축약하고 있다. 이러한 정전의 지속은 사람들의 의식과 가치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적인 변화와 특성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코드로 자리 잡아 냉전이 종식된 오늘날 까지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다.
5. 결 론
전쟁의 비극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전쟁 또한 수많은 인명피해와 물적 피해를 안겨준 한반도에 내린 재앙이었다. 전쟁의 경험은 사람들의 정서와 심리에도 큰 충격을 안겨주어 여전히 남북한 사회의 대중 속에 잠재된 의식으로 남아있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구조가 재편되고 문화가 형성되고 의식구조의 재생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단순한 역사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지속성을 지닌 사건으로서 끊임없이 연구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에서 풀지 못한 과제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고 앞으로 더욱 많은 과제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전쟁은 역사에 있어서 연구하고 규명해야할 문제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한반도의 사람들이 짊어져야할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 참고문헌
존 메릴,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 두산동아, 2004
와다 하루키, 「한국전쟁」, 창작과 비평사, 1999
손호철 외, 「한국전쟁과 남북한사회의 구조적 변화」,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1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국방군사연구소, 1987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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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04
  • 저작시기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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